사랑은 잊히고 근육은 남는다[박연준의 토요일은 시가 좋아]〈9〉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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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 급 마음이 아팠다 이건 가짜 마음이란 걸 알아 운동을 하러 갔다 사랑해주는 사람보단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했으면 좋겠다 그런데 내가 사랑하지 않을 땐 사랑해주더니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니 내가 사랑하게 되었다 로봇 개도 쓰다듬는 기능을 넣는다 사람이 사랑할 수 없는 건 없고 사랑하고자 하면 다 사랑할 수 있는데 왜 나는 사랑받지 못하는 걸까 급 욕심이 들어 운동을 하러 갔다 하나둘 하나둘 바벨을 들었다가 내려놓고 바벨을 들었다가 내려놓고 사랑도 들어보고 슬픔도 들어보고 사람 마음이 제일 어렵네 잠시 놓쳐도 보았다 (중략) 곰도 사람의 뒤로 덩치 큰 무언가가 있을까 두려워 두 발로 선다고 아마 나의 사랑도 혼자 서 있는 넓은 종이의 공포가 아닐까 그런 백지장을 맞들어줄 이가 없어 하나둘 하나둘 힘을 기르고 있나

―유수연(1994∼ )



화자는 급성으로 온 사랑에 허둥댄다. “이건 가짜 마음이란 걸 알아” 운동으로 떨쳐내려 한다. 바벨을 들었다 놓으며 “왜 나는 사랑받지 못하는 걸까”, 인류의 난제를 고민한다. 회사원은 상사에게, 가게 사장은 손님에게, 자식은 부모에게, 가수는 팬에게, 사랑에 빠진 자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 받고 싶은 법이다. 그는 바벨 대신 사랑과 슬픔을 들어본다. 아무래도 마음이 제일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마음을 일부러 놓친다. 그러다 깨닫는다. 결국 마음은 “혼자 서 있는 넓은 종이의 공포”처럼 두려운 마음이란 것! 백지의 공포를 모르는 시인이 어디 있으랴. 사랑도 글쓰기도 마음도 백지부터 시작해야 한다. 앞날을 알 수 없다. 어떤 고통이 올지 모른다. 그러니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의 바탕은 두려움과 초조함이리라.

시를 다 읽고 제목을 다시 보면 웃음이 나온다. 포스터에 박힌 표어처럼, 사랑에 발목 잡히지 않겠다는 다짐처럼 들린다. 그렇다 해도 감기처럼 ‘드는’ 사랑이라면 도리 없이 뒤척일 날이 또 있겠지만! 이 위트 넘치고 아름다운 젊은 시인은 백지 위에서 얼마든지, 무엇이든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은 잊히고 근육은 남는다#사랑#유수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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