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꽃’ 능소화의 고객 만족 전략[서광원의 자연과 삶]〈110〉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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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광원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장
서광원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장
조선시대 과거 시험을 보는 사대부들이 오매불망 선망하는 꽃이 있었다. 임금이 급제자들에게 내리는 어사화(御賜花)였다. 진짜 꽃은 아니었다. 길게 쪼갠 가느다란 나무를 종이로 감싼 후, 여러 색깔의 종이로 만든 꽃을 줄줄이 단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꽃이었기에 모두가 바라 마지않는 꽃이었다. 급제자는 이 영광의 꽃가지를 머리에 꽂고 3일 동안 일가 친척에게 인사를 다니며 만천하에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릴 수 있었다.

다른 장식들도 있었을 텐데 왜 꽃이었을까? 명확한 기록은 없지만 15∼20년이 걸린다는 과거 공부를 끝내고 드디어 갈고닦은 능력을 꽃피울 때가 됐다는 뜻이지 않았을까 싶다.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능소화도 어사화로 불렸다는 점을 보면 가끔은 생화를 쓰기도 한 듯하다. 조선시대에 능소화는 기품이 있다 하여 양반집에서만 기를 수 있었던 ‘양반꽃’이었다.

그런데 이 꽃을 잘 보면 단순히 아름다움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꽃잎에 나 있는 긴 선들이 그거다. 그냥 나 있는 것 아닌가 싶지만 살아 있는 세상에 이유가 없는 게 없듯, 이 선들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에게 꽃은 아름다움의 상징이지만, 꽃의 본래 목적은 세대를 이어갈 씨앗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움직일 수 없으니 자유자재로 돌아다닐 수 있는 벌과 나비 같은 매개동물들을 오게 해 꽃가루받이를 하게 하는 장치가 바로 꽃이다. ‘여기에 맛있는 꿀이 있으니 어서 오라’는 화려한 간판이자 초대장이다.

문제는 이런 손짓을 하는 게 혼자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꽃들이 피는가. 공급이 넘치면 경쟁은 필연이다. 고객이라 할 수 있는 벌과 나비를 위한 더 좋은 서비스들이 속속 등장했고 능소화에 있는 선들도 그중 하나다.

이게 무슨 말인가 싶을 텐데, 우리 관점이 아니라 벌과 나비들의 관점에서 보면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꽃잎 바깥쪽에서 가운데를 향해 있는 이 선들은 ‘이쪽으로 오면 달콤한 꿀이 있다’는 신호다.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공항에 비유하자면 착륙 유도선 역할이다. 요즘 능소화와 함께 자주 볼 수 있는 비비추꽃에 있는 선들 역시 마찬가지다. 능소화는 더 나아가 비교적 큰 편인 다섯 장의 꽃잎을 모두 연결한 통꽃 구조로 찾아온 고객들에게 흔들림이 덜한 착륙장까지 제공한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머물수록 꽃가루받이에 도움이 되는 까닭이다.

여담이지만, 이 통꽃 구조 역시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꽃들의 세상에서 드문 편인 통꽃의 능소화는 우아함을 한껏 드러내다가 때가 되면 통째로 툭 떨어진다. 꽃잎이 하나씩 지지 않고 꽃 하나가 그대로 떨어진다. 흰 눈 위에 툭 떨어지는 붉은 동백꽃만큼 강렬한 대비 효과는 없지만 지는 모습은 비슷하다. 양반꽃으로 불렸던 것도 뜻을 품은 선비라면 모름지기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마음이 투영된 게 아니었을까 싶다.

어쨌거나 살아 있음을 지향하는 생물학적 관점으로 보면 능소화는 더 나은 삶을 위한 과정에서 아름다워진 것이다. 스스로를 아름다운 존재로 만들었다. 아무렇게나 사는데 잘 살아 있는 건 없다.

#조선시대#과거시험#어사화#능소화#양반꽃#통꽃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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