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리 에세이스트새벽에 엄마네 집에 도착했다. 짐을 푸는 사이 엄마와 아이들은 까무룩 잠들었다. 아이들 발을 붙잡고 발치에 웅크려 잠든 엄마. 새벽녘, 작은 집에 맴도는 훈기에는 손주들 먹이려 고아둔 미역국 냄새가 배어 있었다. 몸집은 어린애처럼 조그마한데, 주름은 할머니처럼 자글자글해진 엄마. 이불을 끌어 덮어주었다. 문득 지인이 해준 숙제 이야기가 떠올랐다.
30년 전쯤인가. 남고에 다닐 때야. 나이 지긋한 한문 선생님이 계셨어. 한문은 인기 없던 과목이라서 딴짓하거나 엎드려 자는 애들이 태반이었지. 선생님은 그래도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자고 했어. 자신은 충실히 수업을 준비할 테니, 너희도 대놓고 딴짓은 하지 말자고. 간혹 그런 친구들을 보면 다가가 안아주면서 “사랑해”라고 말해주셨어. 그러면 애들이 차라리 체벌해 달라고 했지. 뚝뚝한 남고생들에겐 포옹과 사랑이 훨씬 힘들었거든.
한 친구가 포옹을 뿌리치면서 이런 거 좀 하지 말라고 대들었어. 그날, 선생님은 수업과는 전혀 상관없는 숙제를 내주셨어. “딱 하나만 해 보자. 부모님 주무시는 얼굴 5분만 보고 오기. 정 힘들다면 1분이라도 좋아. 이 숙제 후에도 수업 시간에 다른 걸 하고 싶다면 다 들어줄게.”
그 숙제가 뭐라고. 며칠 후에나 시도해 봤어. 밤에 방문을 열어보았더니 어머니가 벽을 보고 주무시더라. 얼굴을 봐야 하는데 웅크린 뒷모습만 보였어. 그런데 도무지 다가가질 못하겠는 거야. 우두커니 보고만 서 있었어. 이불이 오르내리고 작은 숨소리가 들려왔어. 어느 순간부터 어머니 숨과 내 숨이 이어지더라. 조용히 오르내리다가, 서서히 숨이 가빠지고 가슴이 들썩거리고 눈이 뜨거워져. 되게 아픈 거야, 마음이. 문을 채 닫지도 못하고 방을 나섰어. 그러고도 한참이나 문틈으로 어머니 자는 모습을 바라보았어.
다가온 한문 시간, 반 애들은 교과서를 펴고 반듯하게 앉았어. 선생님은 열심히 가르쳤고, 딴짓하거나 자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어. 수업을 마치며 선생님이 말씀하셨어. “참 고마워. 여러분은 앞으로 살면서 실수는 하겠지만, 나쁘게 살지는 않을 거야. 내가 알아. 나는 믿어.”
종종 지인의 선생님이 내주셨다던 숙제를 생각했다. 나도, 실수는 하더라도 나쁘게 살지는 않겠노라 다짐하면서. 마흔쯤 살아보니 곁에는 늙어가는 부모와 자라나는 아이들이 있다. 위를 보아도 아래를 보아도 그저 먹먹해지는 마음. 이번 생에서 나에게 주어진 숙제는 무엇일까.
곤히 잠든 얼굴들을 바라보았다. 새벽의 천사가 된 기분이었다. 탈무드에 나오는 천사는 태어날 아이들에게 다가가 괴로운 기억들 잊게 해주려고 지그시 인중을 눌러주었다지. 나는 엄마에게 다가갔다. 미간을 찌푸린 채 새우잠을 자는 엄마. 정말로 그렇구나, 마음이. 사람들을 대할 때마다 나를 키운 이 얼굴을 기억할 거야.
당신이 살아온 힘들고 아픈 기억들 자는 동안이라도 잊어버렸으면 하는 바람으로 지그시 미간을 눌러주고 싶었다. 어느새 깊이 패어 주름이 된 미간을 만져주며 기도해야지. 엄마처럼 나도 사랑해 볼게. 오래오래 곁에 있어 줘.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