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폭에 되살린 ‘마음의 고향’… 고향 잃은 도시민 위한 기억 속 농촌[양정무의 미술과 경제]

  • 동아일보

산업혁명 시기, 농촌 노스탤지어

존 컨스터블의 ‘건초 마차’(1821년). 아버지가 소유한 플랫퍼드 방앗간에서 바라본 고향 풍경을 생생히 담았지만, 실제로는 산업혁명 여파를 겪던 당시의 농촌 현실과는 거리가 있다. 사진 출처 런던 내셔널갤러리
존 컨스터블의 ‘건초 마차’(1821년). 아버지가 소유한 플랫퍼드 방앗간에서 바라본 고향 풍경을 생생히 담았지만, 실제로는 산업혁명 여파를 겪던 당시의 농촌 현실과는 거리가 있다. 사진 출처 런던 내셔널갤러리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내가 놀던 정든 시골길 / 소달구지 덜컹대던 길 / 시냇물이 흘러내리던 / 시골길은 마음의 고향.” 임성훈 씨가 1976년에 발표한 노래 ‘시골길’의 첫 구절이다. 오래전 노래인데, 가사가 입가에 잘 맴돈다면 최소 50대 후반일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그간 한국 사회가 겪은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를 고려한다면, 이 세대가 소달구지 덜컹대던 시골길을 마음의 고향으로 생각하는 마지막 세대가 아닐까 한다.》

이 노래와 아주 잘 어울리는 그림 한 점이 있다. 바로 영국을 대표하는 화가 존 컨스터블(1776∼1837)이 그린 ‘건초 마차’다. 노래 속 소달구지가 마차로 바뀌었을 뿐, 풍경 속 정서는 아주 비슷하다. 오두막 같은 농가를 앞에 두고 시냇물을 건너는 마차, 그리고 이 마차를 보고 짖는 강아지까지 시골 하면 떠오를 이미지가 그림에 잘 담겨 있다.

이 작품이 제작된 해는 1821년, 지금으로부터 약 200년 전이다. 흥미롭게도 당시 영국도 산업혁명의 여파로 농촌사회가 흔들리고 있었다. 1970년대 우리나라가 새마을 운동으로 전통적인 시골 풍경이 빠르게 바뀌었듯, 18세기 말부터 이 그림이 그려지던 19세기 초까지 영국도 ‘제2차 인클로저 운동’(농경지를 양을 방목하는 목장으로 바꿈)으로 전통적인 농촌사회가 급격히 해체되고 있었다.

존 컨스터블 자화상. 사진 출처 영국 국립초상화미술관
존 컨스터블 자화상. 사진 출처 영국 국립초상화미술관
먼저 이 그림을 그린 컨스터블의 생애를 간단히 살펴보면, 그는 영국 남동부 서퍽 이스트 버그홀트에서 부농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다. 아버지 골딩 컨스터블은 대지주였다. 93에이커(약 37만6357㎡)에 이르는 땅을 소유했고, 방앗간과 수확한 밀을 런던으로 실어나를 배도 있었다. 아버지는 건강이 나쁜 형을 대신해 둘째가 가업을 잇기를 바랐지만, 그는 아버지를 7년이나 설득해 천신만고 끝에 화가의 길로 나가게 된다.

존 컨스터블의 ‘건초 마차’ 속 오두막은 소작농이 실제 거주했던 곳으로, 현재도 남아 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존 컨스터블의 ‘건초 마차’ 속 오두막은 소작농이 실제 거주했던 곳으로, 현재도 남아 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이런 고집스러움은 컨스터블의 그림에서 잘 나타난다. 컨스터블은 일평생 고향 땅을 그린다.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풍경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생생하게 그려 지금까지도 영국을 대표하는 국민화가로 사랑받고 있다. ‘건초 마차’ 역시 그의 아버지가 소유한 플랫퍼드 방앗간에서 바라본 고향 풍경으로, 그의 시선은 더 복잡미묘했을 것이다. 그림 왼편의 작은 오두막집은 소작농 윌리 롯의 집으로, 지금까지도 잘 남아 있다.

그런데 과연 ‘건초 마차’의 풍경은 당시 현실을 눈에 보이는 대로 충실히 반영했을까? 이 그림이 완성되던 1821년 무렵, 전통적인 영국 농촌은 급격히 붕괴하고 있었다. 산업혁명 여파로 농촌 인구는 도시로 이동해 노동자가 됐고, 런던 같은 대도시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시골의 전통적인 삶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었다. 농업 구조에도 변화가 생겼다. 도시 인구가 급증하면서 식량 공급에 대한 압력은 커졌고, 농촌은 점차 목초지에서 밀 같은 식량 생산기지로 재편됐다. 오래된 공동 농지도 사라지고 농업의 상업화가 빠르게 진행됐다. 즉, 컨스터블이 그림 속에서 보여준 평화로운 농촌은 이미 현실에서 급속히 사라지는 중이었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흥미로운 장면이 하나 더 보인다. 화면 오른쪽 멀리, 거의 점처럼 작지만 분명하게 흰 셔츠를 입고 일하는 사람 여러 명이 눈에 들어온다. 이들은 밀을 수확하는 듯 허리를 굽혀 열심히 일하고 있다. 전면의 마차를 보면 수레가 텅 비어 있다. 마차는 이들이 수확한 밀을 실으려 개울물을 건너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진짜로 눈에 띄어야 할 것들이 보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이 지역은 이미 제2차 인클로저 운동의 여파로 공동 농지나 소규모 농지가 사라지고 울타리로 둘러싸인 대농장이 급증했다. 이런 울타리와 함께 공장 굴뚝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컨스터블의 그림에는 이런 시대적 요소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사람들은 평화롭게 물을 긷고 낚싯대를 드리우며, 강아지가 뛰노는 등 모두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렇다면 이 그림이 보여주는 것은 무엇인가. ‘건초 마차’는 영국의 농촌을 마음의 고향인 것처럼 미화한 것이다. 다시 말해 급격히 해체되던 농촌 풍경이 아니라 화가가 유년기에 느꼈던 평화로운 농촌을 그리워하며 그린 그림인 셈이다. 사실 이 그림을 그리기 몇 해 전인 1817년 컨스터블도 고향을 떠나 런던으로 이주했다. 런던의 미술시장을 더 본격적으로 겨냥하기 시작한 것이다. ‘건초 마차’도 처음부터 런던 시민의 눈높이에 맞춘 그림이었다. 런던 시민에게 이 그림은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목가적이며 안정적인 마음의 고향으로 다가가야 했다.

‘건초 마차’는 표면적으로는 충실한 풍경화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산업혁명이 가져온 불안과 상실감을 지워버린 그림이다. 도시화의 시대에 사람들은 마음의 피난처를 찾았고, 그곳은 현실의 농촌이 아니라 기억 속 농촌이었다. 마치 우리가 ‘시골길은 마음의 고향’이라 흥얼거리듯, 19세기 영국인들도 이미 떠나온 세계를 시골 그림 속에서 되찾고자 했다.

이 그림은 1824년 파리 살롱전에 출품돼 프랑스에서 더 큰 반향을 일으켰다. 컨스터블은 외국 작가임에도 최고상인 황금 메달까지 받는다. 특히 젊은 외젠 들라크루아는 컨스터블의 풍경화에 완전히 매료돼 이듬해 영국을 방문했을 때 그의 작업실을 찾으려 했을 정도다.

장 프랑수아 밀레 자화상. 사진 출처 보스턴미술관
장 프랑수아 밀레 자화상. 사진 출처 보스턴미술관
컨스터블의 영향력은 프랑스 농민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에게도 이어진다. 밀레가 그의 작품을 직접 봤다는 기록은 없지만, 당대 프랑스 자연주의 풍경화가들에게 컨스터블의 영향력이 넓게 퍼져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두 사람 사이의 계보적 연결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밀레의 대표작 ‘이삭 줍는 여인들’도 그렇다. ‘건초 마차’와 나란히 놓고 보면 두 그림 속엔 마차도 보이고 일하는 사람도 보인다.

존 컨스터블의 ‘건초 마차’ 계보를 잇는 장 프랑수아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1857년). 이삭 줍기는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토지 사유화 강화로 축소됐지만, 밀레는 그림에 당당하게 담았다. 배경에 건초 마차(왼쪽 원)와 곡식더미를 경비하는 관리인(오른쪽 원)이 보인다. 사진 출처 오르세미술관
존 컨스터블의 ‘건초 마차’ 계보를 잇는 장 프랑수아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1857년). 이삭 줍기는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토지 사유화 강화로 축소됐지만, 밀레는 그림에 당당하게 담았다. 배경에 건초 마차(왼쪽 원)와 곡식더미를 경비하는 관리인(오른쪽 원)이 보인다. 사진 출처 오르세미술관
우리는 밀레의 작품을 보통 추수 후 남은 이삭을 줍는 농촌 여인들의 성실한 노동을 그린 평온한 가을의 시골 장면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이 그림이 제작된 시기, 즉 1850년대 프랑스 농촌의 현실을 고려하면 전혀 다른 의미가 드러난다. 프랑스 혁명 이전에는 농촌 빈민들이 수확이 끝난 들판에서 남은 이삭을 줍는 일이 관습적으로 허용됐지만, 19세기 중반에는 토지 사유화가 강화돼 이러한 관습은 점차 축소되고 있었다. 즉, ‘이삭 줍는 여인들’의 장면은 당대 기준으로는 이미 경계 대상이었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고개 숙여 이삭을 줍는 세 명의 여인은 소박한 농촌의 풍경을 보여주는 듯하지만, 멀리 배경에는 추수한 곡식더미가 한가득 쌓여 있다. 그 오른편에는 관리인이 말을 타고 이를 지켜보는데, 마치 여인들이 넘어오는 것을 경계하는 듯하다. 전면의 노동과 후면의 풍요, 이 대비는 농촌 내부의 빈부 격차와 긴장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전원 풍경화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산업화와 근대화 속에서 첨예해진 농촌의 갈등을 그려낸 셈이다.

사실 컨스터블의 ‘건초 마차’나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 모두 산업화 시대 해체되는 농촌 풍경을 사실적인 필치로 진지하게 잡아낸 그림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세부를 살펴보면 불편한 현실은 살짝 지우면서 갈등을 우회해 드러내고 있다. 컨스터블은 산업화 속 시골 풍경을 고향의 평온함으로 포장했고, 밀레는 전경과 배경을 멀찍이 떼어 놓아 농촌 내부의 갈등을 은밀하게 숨겼다. 결과적으로 두 그림은 화면 속에서 사실과 허구를 절묘하게 배합함으로써 산업화 시대 도시민이 꿈꾸는 농촌에 대한 향수를 생생하면서도 추억처럼 아련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오늘날까지 호소력 있는 풍경화로 남아 있다.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존 컨스터블#건초 마차#장 프랑수아 밀레#산업혁명#영국 농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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