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고통에 대한 공감[정덕현의 그 영화 이 대사]〈83〉

  • 동아일보

“고통이라는 건 절대로 익숙해질 수가 없거든.”

―장준환 ‘지구를 지켜라’

외계인들이 지구를 위험에 빠뜨릴 것이라 믿는 병구(신하균 역). 그는 안드로메다 왕자와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외계인이라 믿는 유제화학 강만식(백윤식 역) 사장을 납치한다. 외계인들로부터 지구를 구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자신이 외계인이 아니라며 완강히 버티는 강 사장에게 병구는 진짜 정체를 밝히기 위한 잔혹한 고문을 시작한다. “다 똑같아. 아무것도 모른다고 잡아떼다가 결국엔 다 불게 되지. 고통이라는 건 절대로 익숙해질 수가 없거든.”

2003년 개봉한 장준환 감독의 영화 ‘지구를 지켜라’는 당대만 해도 ‘문제작’이라 평가됐다. 황당한 외계인 이야기에 잔혹한 고문이 이어지는 범죄스릴러지만 한껏 발랄한 분위기의 블랙코미디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신한 이 작품은 당시 영화제 상을 휩쓸 정도로 화제가 됐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흐른 지금, ‘지구를 지켜라’는 미국 할리우드에서 ‘부고니아’라는 이름으로 리메이크됐다. 이로 인해 다시금 원작이 화제가 되고 있다.

이 영화는 블랙코미디로 그려졌지만 잔혹한 고문이 이어져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이 전해진다. 특히 물파스와 이태리타월을 이용한 고문은 워낙 현실적이라 강렬한 잔상을 남긴다. 결국 병구의 광기를 통해 이 작품이 하려는 이야기는 뭘까. 인간의 폭력성으로 불러들인 지구의 위기다. 병구와 가족의 삶을 파괴한 일련의 사건들은 바로 그 폭력성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매일 지구의 위기에 대한 경고들이 넘쳐나지만 우리는 둔감하게 살아간다. 그래서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병구의 고문은 각종 경고에 둔감해진 우리를 깨우기 위한 것처럼 보인다. 절대 익숙해질 수 없는 고통을 통해, 둔감해진 세상의 고통을 함께 느껴 보라고 말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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