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발 앞에서 묻다[이준식의 한시 한 수]〈330〉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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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홍안이었던 얼굴이 늙은이가 되고, 순식간에 댕기 머리가 백발로 변했구나.

일평생 겪은 마음 상한 일 그 얼마이던가. 불문(佛門)에 귀의하지 않으면 어디에서 시름을 달래랴.

(宿昔朱顔成暮齒, 須臾白髮變垂髫. 一生幾許傷心事, 不向空門何處銷.)

―‘백발을 탄식하다(탄백발·嘆白髮)’ 왕유(王維·701∼761)


어제까지 붉던 얼굴이 순식간에 백발로 변해버린다. 시는 그 허망한 변화를 단도직입적으로 찌른다. ‘일평생 겪은 마음 상한 일 그 얼마이던가. 불문에 귀의하지 않으면 어디에서 시름을 달래랴.’ 여기에 젊음의 상실과 삶의 번뇌, 그리고 해탈에 대한 갈망이 농축돼 있다. 단순한 종교적 귀의가 아닌 스스로의 내면을 직시하려는 시인의 결연한 다짐이 드러난다. 왕유의 생애를 떠올리면 이 시는 더 선명해진다. 스물한 살에 장원 급제하며 화려하게 출발했지만 권력 다툼 속에서 좌천을 거듭했고, 안사의 난 때는 반군에게 억류돼 굴욕을 겪었다. 서른 무렵 아내를 잃고 독신으로 지내야 했던 개인적 고독 또한 그의 어깨를 눌렀다. 외부의 풍랑과 내면의 상흔이 겹겹이 쌓였으니 불문을 향한 눈길은 어쩌면 필연이었을 것이다.

세월은 누구에게나 잔혹하다. 젊음은 사라지고 흰머리는 늘어나며 마음을 흔드는 사건들은 끝없이 이어진다. 왕유가 불문에서 찾으려 했던 위안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누군가는 종교에서, 누군가는 예술에서, 또 다른 누군가는 일상의 작은 평온에서 해탈의 순간을 만난다. ‘번뇌를 직시하되 각자의 방식으로 해탈을 찾아라.’ 이 시가 울림을 주는 이유일 것이다.

#왕유#백발#불문#해탈#번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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