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에게[이준식의 한시 한 수]〈334〉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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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비 부슬부슬 밤은 이슥한데, 대들보 위의 군자가 내 집에 들었구나.

뱃속엔 시서(詩書)가 만 권이나 들었지만, 침상 머리맡엔 금은이 반푼도 없다네.

나갈 때 우리 누렁이 놀라게 하지 말고, 담 넘을 땐 난초 화분 깨트리지 마시라.

날이 추워 옷 걸치고 배웅하진 못하지만, 달 없는 밤을 틈타 부잣집을 노리시라.

(細雨蒙蒙夜沉沉, 梁上君子進我們. 腹內詩書藏萬卷, 床頭金銀無半分.

出門休驚黃尾犬, 躍牆莫損蘭花盆. 天寒不及披衣送, 趁着月黑趕豪門.)

―‘좀도둑에게(증소투·贈小偸)’ 정섭(鄭燮·1693∼1765)


추적추적 비 내리는 밤에 찾아온 도둑, 시인은 그를 내치기에 앞서 시 한 수를 읊는다. 차근히 타이를 뿐 질타도 위협도 하지 않는다. 대문으로 나갈 테면 우리 개 놀라게 하지 말고, 담장을 넘을 거면 난초 화분을 조심하라는 당부가 생뚱맞다. 시인은 서화를 팔아 생계를 꾸릴 만큼 세간에 명성이 자자했지만 삶은 궁핍했다. 학식은 넘쳐날지언정 수중엔 땡전 한 푼 없다는 그의 말은 해학이면서 자조일 테다. 그럼에도 그는 도둑을 몰아세우지 않고 차라리 부잣집을 찾아가라며 돌려 말한다.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자세와 약자에 대한 연민, 이런 게 개결(介潔)한 선비의 풍모가 아니겠는가.

집안에 도둑이 들자 시인이 실제 이 즉흥시를 날렸는지, 아니면 개와 난초만은 온전하기를 바라면서 조바심 속에 한 번 공상해 본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나 시인의 푸근한 배려심만은 확실해 보인다. 채찍이 아니라 작은 등불 같은 목소리로 울린다.

#도둑#시인#안빈낙도#해학#자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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