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황 사신 두고 청일전쟁 승전기념비까지… 경성에 침투한 일본 신사[염복규의 경성, 서울의 기원]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2월 5일 23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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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세력 확장 보여준 경성신사… 전승기념비 세워 ‘서울 주인’ 선언
조선신궁은 식민지 중 유일 칙제사… “韓日 형제, 병합은 당연” 논리 부각
천황 사망 뒤 할복 무사 기린 신사도 광복 후 한국 상징물로 빠르게 대체

1925년 준공 직후 조선신궁의 웅장한 전경. 당시 일본 천황은 식민지 중 유일하게 조선에 사신을 보내 조선신궁을 칙제사로 운영하며 영구한 식민통치를 기원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25년 준공 직후 조선신궁의 웅장한 전경. 당시 일본 천황은 식민지 중 유일하게 조선에 사신을 보내 조선신궁을 칙제사로 운영하며 영구한 식민통치를 기원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신사로 본 日 식민지 정책

1913년 8월 29일 ‘왜성대(倭城臺) 위대신궁(大神宮)’에서는 ‘일한병합기념일 임시제전’이 거행됐다(매일신보). 이듬해 7월 30일에는 ‘경성의 관민 일동’이 메이지 천황(1912년 7월 30일 사망)을 추모하는 ‘요배(遙拜)의식’을 ‘왜성대 공원’에서 거행했다(매일신보). ‘왜성대’ 혹은 ‘왜성대 공원’이라고 부르는 곳이 경성의 일본인에게 뜻깊은 장소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곳은 어디일까?》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서울 지하철 4호선 명동역에서 중구 소파로를 따라 남산으로 올라가다 보면 과거 서울시교육청, 서울애니메이션센터 등이 있었던 자리가 나온다. 19세기 말 일본 공사관이 들어섰던 곳이다. 공사관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통감부 청사가 됐으며 병합 이후 경복궁에 새 청사를 지을 때까지 조선총독부 청사로 사용됐다. 충무로 일대 남촌에 정착한 일본인들은 공사관 일대를 왜성대라고 불렀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주둔했던 장소라는 데서 비롯한 명명이다. 1897년 일본인 거류민단은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일대의 토지를 얻어 공원을 조성했다. 왜성대 공원이 된 것이다.

공원을 확보한 거류민단은 그들의 정신적 구심점이 될 신사(神社)를 건립했다. 거류민단이 건립한 신사는 처음에 남산대신궁(南山大神宮)이라고 불렸다. 이름은 거창하지만 작은 이주민 신사였다. 후일 거류민단은 이 작은 규모의 신사를 경성신사(京城神社)로 이름을 바꾸고 부속 신사로 텐만궁(天滿宮), 이나리신사(稲荷神社), 하치만궁(八幡宮)까지 건립했다. 이와 함께 신사 본사로 올라가는 입구에는 청일전쟁의 승전을 기념하는 갑오전역기념비까지 세우고 매년 위령제나 초혼제 등을 개최했다.

일제강점기 사진엽서에 담긴 경성신사(현 숭의여대 일대)는 벚꽃이 만개한 전형적인 일본적 경관을 보여준다. 염복규 교수 제공
일제강점기 사진엽서에 담긴 경성신사(현 숭의여대 일대)는 벚꽃이 만개한 전형적인 일본적 경관을 보여준다. 염복규 교수 제공
경성신사의 건립과 확장 과정은 일본인의 남촌 정착과 세력 확장 과정을 상징한다. 신사를 세운 주체가 국가나 정부가 아닌 거류민이라는 민간 집단이거니와 토속신인 공부의 신, 농업의 신, 전쟁의 신 등을 모시는 텐만궁, 이나리신사, 하치만궁 등은 모두 신도(神道)의 민간 신앙적 측면을 반영한다. 게다가 신도와 직접 관계가 없는 갑오전역기념비를 세운 것도 의미심장하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일본은 비로소 한반도에서 청나라에 대해 우위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거류민의 입장에서 보면 그간 남대문통 등지의 상업가에서 늘 청나라 상인에게 눌려 지내던 일본 상인이 기를 펴는 계기가 되었다. 기념비 건립은 이제 남산, 서울의 주인은 일본인이라는 선언이었달까?

길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면 안중근의사기념관에 이른다. 기념관이 위치한 넓고 평평한 지대는 1925년 조선신궁 상광장으로 조성됐다. 신궁의 본전(本殿)과 배전(拜殿)이 있었던 곳이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을 대표할 신사인 신궁의 건립 계획을 1910년대 초부터 세웠으나, 3·1운동 이후 구체화했다. 일본 정부는 미증유의 대규모 독립 시위가 가져온 정신적 충격에서 벗어나 영구한 식민통치를 신에게 기원하려는 종교적 바람에서 조선신궁 건립을 공식적으로 허가했다.

조선신궁은 국가 의례를 거행하는 ‘관폐대사(官弊大社)’였으며 천황이 직접 사신을 보내는 ‘칙제사(勅祭社)’이기도 했다. 1920년대 일본의 칙제사는 본토에도 16곳밖에 없었다. 식민지에는 조선신궁이 유일했다. 조선신궁의 제신(祭神)으로는 일본 열도의 시조신으로 일컬어지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와 메이지 천황을 선정했다.

이것은 그냥 선정한 것이 아니다. 일본의 고대 역사서인 일본서기에 따르면 아마테라스의 동생인 폭풍의 신 스사노 오노미코토(素盞鳴尊)는 난폭한 행동을 하다가 열도에서 쫓겨난다. 당시 식민사학자들은 스사노가 쫓겨간 곳이 바로 한반도 남부로 이때부터 일본에서 건너간 세력이 한반도를 지배했다고 주장했다. 식민사학의 주요 논리 중 하나인 ‘임나일본부설’이 떠오른다.

여기에서 좀 더 나아간 이야기가 스사노가 바로 삼국유사의 단군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일본 시조신의 동생이 고대 한반도의 지배자 단군이었기 때문에 원래 일본과 한국은 형제의 나라이며, 한일병합은 헤어졌던 형제가 만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논리다. 그리고 여기에서 형제의 재회를 가능하게 한 병합의 공로자는 메이지 천황이라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준공 당시 조선신궁은 총 면적 약 12만 평의 대지에 상, 중, 하 세 광장으로 이뤄져 웅장한 경관을 창출했다.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계단을 내려가면 나오는 현재 김구와 초대 부통령 이시영의 동상이 있는 백범광장이 중광장이며, 다시 그 아래 남산공원 입구 삼거리가 하광장에 해당한다. 하광장에는 신사를 상징하는 커다란 도리이(鳥居)를 세웠다. 방문객이 단골로 사진을 찍는 장소였다. 일제 말기 조선총독부가 이른바 ‘황국신민화’ 정책을 시행하면서 자의 반, 타의 반 조선신궁을 찾는 이들이 증가했다. 일부 부유층 중에는 이곳에서 일본식 결혼식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1934년 남산 일대에는 또 하나의 신사가 들어섰다. 조선총독부는 경성신사 바로 맞은편에 일본 육군 대장을 지낸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1849∼1912)를 모시는 노기신사를 건립했다. 노기는 어떤 사람이기에 본토도 아닌 식민지 조선에 그를 모시는 신사가 세워진 것일까?

현재 아동복지시설 남산원 입구에 남아 있는 노기신사의 수조. 염복규 교수 제공
현재 아동복지시설 남산원 입구에 남아 있는 노기신사의 수조. 염복규 교수 제공
메이지 유신의 중심 세력인 조슈번(長州藩·현 야마구치현) 출신 하급 무사였던 노기는 막부와의 전쟁 과정에서 여러 차례 활약해 초기 일본 육군의 주역이 됐다. 그는 청일전쟁에도 여단장으로 출정했을 뿐만 아니라 러일전쟁에도 제3군 사령관으로 참전해 전쟁의 승부를 가른 뤼순(旅順) 공략을 지휘했다. 그러나 이런 공식적인 ‘활약상’ 때문에 그를 모시는 신사가 건립된 것은 아니다. 그는 러일전쟁에 참전한 두 아들이 전사했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이 1912년 메이지 천황이 사망하자 부인과 함께 할복 자살했다. 이후 노기는 이른바 ‘군신(軍神)’으로 추앙을 받아 일본 각지에 노기신사가 세워졌다. 조선에도 노기신사를 건립하기로 결정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조선인에게 천황을 위해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충신이 되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광복 후 남산에 신사의 흔적은 비교적 빠르게 지워졌다. 그만큼 상징성이 노골적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신궁의 경우 혹시 한국인에 의해 신궁이 파괴되는 ‘불경한’ 일이 벌어질까 두려워 일본인 신직(神職)들이 자신의 손으로 신궁을 신속하게 해체했다고 한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도리이를 철거한 것이 1947년 7월이다(경향신문·1947년 7월 3일). 그리고 그 자리는 대한민국의 상징물로 채워졌다. 처음에는 이승만 동상이 들어서기도 했으나 1960년대 이래 안중근, 김구 등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식민의 기억’이 강렬한 장소였던 만큼 ‘기억의 역전’도 선명하게 이루어진 셈이다.

그러나 여전히 말없이 남아 장소의 역사를 증언하는 것도 있다. 6·25전쟁 중 군경 유자녀 수용시설로 문을 연 남산원 경내에는 현재도 돌벤치나 탁자 등으로 사용하는 노기신사 유구가 흩어져 있다. 입구에는 원래 신사의 수조(신사에 들어가기 전에 손을 씻는 시설)였던 것이 화단처럼 놓여 있기도 하다. 숭의여대 교내에도 경성신사의 유구가 적지 않게 남아 있다. 그런가 하면 2014년 한양도성 복원을 위한 남산 회현자락 정비사업 과정에서 조선신궁 배전터가 발굴되기도 했다. 서울시는 한양도성현장유적전시관을 조성하며 한양도성의 유구와 그 위에 들어선 조선신궁의 흔적을 함께 보존했다. 식민의 부정적 유산을 망각하지 않고 역사적 교훈을 남기기 위한 고민의 산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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