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눈물의 얼음’… 에어컨 시대 ‘얼음의 눈물’[이상곤의 실록한의학]〈164〉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7월 28일 23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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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
시골 동네엔 여름마다 진풍경이 벌어지곤 했다. ‘아이스께끼’라 불린 얼음과자 장수가 마을에 찾아오면 집에 있는 귀한 물건이 모조리 사라졌다. 어린아이들은 달고 시원한 아이스께끼를 먹기 위해 귀중품을 ‘엿 바꿔 먹듯’ 가져다줬다. 그 시절 아이스께끼는 그만큼 귀한 음식이었다. 알고 보면 사카린이나 설탕 넣은 물에 막대기를 꽂아 얼린 싸구려 음식이었지만, 개인 냉장고가 귀하던 시절 아이스께끼는 얼음의 대용 식품이었던 셈이다.

얼음의 어원은 ‘아리다’ ‘알알하다’ ‘앓다’라는 뜻을 가진 퉁구스어계의 ‘아레이’나 ‘아라이’에서 비롯됐다는 설이 있다. 겨울에 만지면 얼얼하고 아픈 얼음의 촉감에서 비롯된 말일 가능성이 크다.

예부터 한국엔 혹서기에 대비하기 위해 얼음을 저장하는 ‘장빙(藏氷)’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신라시대에 석빙고가 있었다면 조선시대엔 한양에 서빙고와 동빙고가 있었고 궁궐 내에도 내빙고가 있었다.

겨울철 강에서 꽝꽝 언 얼음을 잘라내는 과정을 ‘벌빙(伐氷)’이라 하는데, 손발이 부르트고 동상을 입는 엄청난 노역이었다. 겨울철이 되면 벌빙 부역을 피해 도망가는 남자들이 많아 ‘빙고청상(氷庫靑孀)’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 광해군 13년 실록에 있는 한성부의 보고 내용을 보면 벌빙 부역의 폐해가 얼마나 심했는지를 알 수 있다. “내빙고의 장빙을 이제 실시하려 하는데 금년에는 한강가의 백성들이 거의 도망하였습니다.”

더운 여름 임금이 관청이나 공신, 관료들에게 얼음을 하사하는 행위를 ‘반빙(頒氷)’이라고 했다. 뜻있는 선비들은 이를 백성들의 눈물 젖은 얼음이라 ‘누빙(淚氷)’이라 하며 얼음 받기를 거부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냉장고도 없고 아이스크림도 없던 조선의 뜨거운 여름, 임금들은 내빙고의 얼음을 안고 살았을 것 같지만 실록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얼음이 임금의 건강을 위협했기 때문이다. “임금이 여름에 감기에 걸린 이후 호전되지 않자, 찬 음료와 생과일 채소를 조심한 이후로 나아져 냉한 음식을 멀리하는 것으로 건강 지침을 삼았다”(영조 14년). 헌종 2년 때도 여름철 얼음의 남용을 막아야 한다는 건강 지침은 똑같이 지켜졌다.

‘여름철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는 것은 과거 그만큼 여름철 감기가 흔치 않았음을 뜻한다. 즉, 뜨거움은 감기를 이기고 차가움은 감기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연중 고온다습한 인도에서도 체온 이하의 음식을 먹지 않게 하는 것으로 미뤄 보면 충분히 근거가 있는 얘기다.

인체는 기계보다 더 정밀하게 체온을 36.5도로 유지한다. 하지만 에어컨이 보급된 현대에 들어 인체는 체온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 에어컨이 없는 바깥에선 온도를 낮추기 위해 몸 안의 에어컨을 켜고, 실내에 들어오면 과한 에어컨의 냉기에 맞서 몸 안의 보일러를 켜 체온을 유지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우리 몸은 더운 여름 체온의 항상성을 유지하려고 과로한다. 이는 결국 면역력 약화로 이어져 냉방병을 유발한다. 한방의 시각으로 보면 냉방병에 걸렸을 때 나오는 맑은 콧물과 기침은 폐가 차가워지면서 흘리는 몸의 눈물이다. 냉기와 차가운 음료 섭취를 줄이지 않고 콧물만 없애는 데 급급하면 근본적 치료가 어렵다. 면역 반응의 출발점은 바로 자기 자신임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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