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통상협상에 속도가 붙고 있다. 일단 우리 정부는 6·3대선 등 국내 정치 일정과 상황 등을 고려해 협상 속도를 조절하겠단 입장이지만, 마냥 버티는 게 쉽지만은 않아 보인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조속한 협상을 강조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서다. 미국은 마주 앉는 데만 시간이 꽤 걸릴 듯했던 중국과도 최근 스위스 제네바에서 고위급 무역협상을 갖고 공동성명까지 발표했다. 협상 속도를 내는 게 좋다는 메시지도 꾸준히 내고 있다.
상황이 이쯤 되자, 한미 협상에 영향을 끼칠 변수가 무엇일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커진다. 워싱턴 안팎에선 트럼프 정부가 문제 삼는 한국의 통상정책이나 비관세 장벽 등을 우선 변수로 지목한다. 미국이 통상협상에 안보 등 다른 영역까지 ‘패키지’로 묶자고 요구할지도 관심사다. 우리 국내 정치적 상황이나 트럼프 정부와 다른 국가들 간 협상 상황 등도 한미 협상에 영향을 줄 변수로 꼽힌다.
그런데 최근 만난 미국의 전직 통상 고위 당국자는 흥미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그는 ‘트럼프의 기억’을 협상의 ‘중요한 잠재 변수’로 지목했다.
오래가고 매서운 ‘트럼프의 뒤끝’
이 전 당국자는 트럼프 1기와 2기의 가장 큰 차이로 “지금은 트럼프의 머릿속에 1기 때 기억이 있다는 점”을 꼽았다. 특히 ‘관세 폭탄’을 중심에 둔 트럼프의 통상전쟁은 1·2기 모두 큰 방향성에선 유사하다. 그런 만큼, 트럼프 대통령이 1기 때 겪은 기억과 경험이 이번 협상 과정에서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으로 그는 내다봤다.
트럼프 대통령의 ‘기억’은 바꿔 말하면 ‘뒤끝’이다. 그의 뒤끝은 오래가고 매섭기로도 유명하다. 지난해 11월 트럼프 대통령이 대선에서 승리하자 뉴욕타임스(NYT)는 “동맹과 적 모두 트럼프의 ‘보복의 물결’을 예상한다”는 제목의 기사를 냈다. 당시 전직 미 법무부 관계자는 NYT에 “자신을 화나게 하는 사람들에 대한 트럼프의 보복 욕구는 진짜”라고 했다.
이미 트럼프 대통령은 재집권 후 1기 때 통상협상 기억을 여러 차례 소환했다. 최근 미중 통상협상 직후 기자회견에서도 “나는 기억한다”는 말을 시작으로, 1기 당시 대(對)중국 통상협상 뒷얘기와 그에 대한 자신의 소회까지 묶어 거의 10분가량 말폭탄을 쏟아냈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은 “당시 우린 서명을 눈앞에 뒀지만, 중국이 철회했다. 그때 난 매우 화가 났었다”면서 이번엔 그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도 다졌다.
어설픈 변칙 승부, 역효과 낼 수도
한국과의 협상에선 트럼프 대통령이 1기 때보다 더 많이 요구하고 더 확실한 안전장치를 두려고 할 게 확실해 보인다. 그는 백악관 입성 후 줄곧 “동맹들이 때론 적들보다 더 나쁘다”고 불평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머리 한가운데 자리한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뭔지는 예단하기 힘들다. 다만 트럼프 1기 통상협상을 주도했고, ‘트럼프 무역정책 설계자’로 여전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전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의 발언을 보면 그 단면이 어렴풋이 보인다. 그는 최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이 포스코 같은 훌륭한 회사를 보유한 건 전적으로 보조금과 보호정책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기억 속에 있는 한국은 “‘산업 정책’ 덕분에 성장해 온 불공정한 국가”란 이미지로 요약됐다.
그의 말 중 우리 정부가 새겨들으면 좋을 법한 대목도 있긴 했다. “미국을 대할 땐 ‘현실적 접근’을 취하라”는 조언이 대표적이다. 이미 한미 양국은 서로의 상황을 충분히 알고 있다. 또 트럼프는 ‘우회 전략’을 혐오한다. 그런 만큼 어설픈 변칙 승부나 눈치보기식 접근은 오히려 협상에서 역효과를 낼 거란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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