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우경임]죽지 않는 일터, 서류로부터 오지 않는다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8월 1일 23시 1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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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경임 논설위원
우경임 논설위원
5월 19일 경기 시흥 SPC삼립 시화공장. 뜨거운 빵을 올려 식히는 3.5m 높이 나선형 냉각 컨베이어 벨트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야간 근무 중인 50대 양모 씨가 윤활유를 뿌려 주러 기계 안으로 들어갔다가 상반신이 끼여 목숨을 잃었다. 노동자 과실로 묻힐 뻔했던 양 씨 죽음은 이재명 대통령이 공장을 찾으면서 그 배경이 드러났다.

삼립에서 형님이 일한 적이 있다고 밝힌 이 대통령은 SPC 경영진에게 “몇 교대 했어요?” “왜 12시간씩 했어요?”라고 따져 물었다. 그러면서 사고 원인이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 아니냐”고 했다. 이틀 뒤 SPC는 “생산직 야근을 8시간 이내로 제한하겠다”고 발표했다. 3년간 3명이 죽고 5명이 다쳐도 꿈적하지 않던 SPC가 대통령 한마디에 초과 야근을 없애 버린 것이다.

야근 줄어야 하는 건 맞지만

12시간 맞교대 근무는 임·단협 사항이었다. 고용을 줄이려는 경영자와 시간외수당을 받아 저임금을 벌충하려는 근로자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것이다. SPC가 신속하게 초과 야근을 폐지한 건 그다지 손해가 크지 않아서라는 해석이 나온다. 오히려 민노총 산하 화섬식품노조가 “SPC는 저임금 해소 방안을 밝히지 않았다”며 임금 삭감을 우려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3년간 SPC에서 발생한 사망 사고 3건의 공통점은 야간 근무가 아니다. 2022년 10월 15일 경기 평택 SPL 공장에선 샌드위치 소스 배합 작업을 하던 20대 박모 씨가 교반기(젓는 기계)에 빨려 들어가 즉사했다. 밤샘 근무 중이었던 것은 맞지만 고작 수십만 원짜리 자동멈춤 장치(인터록)가 설치되지 않았다. 이듬해 8월 8일에는 경기 성남 샤니 공장에서 50대 고모 씨가 빵 반죽 도중에 반죽 통을 옮기는 리프트 사이에 끼여 숨졌다. 사고 시간은 낮 1시경이었다. 리프트 하강 시 경보음만 울렸어도 살 수 있었다.

올해 5월 19일 양 씨의 죽음은 새벽 3시경이었다. 더불어민주당 이학영 의원실에 따르면 사고 기계는 시화 공장이 설립된 1995년 도입된, 최소 30년 이상 사용한 노후 기계였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윤활유를 뿌려 주는 자동분사장치가 제 기능을 못 했다고 밝혔다. 망가지기 직전의 기계를 바꾸기는커녕 기계 값보다 싼 사람을 밀어 넣었고 인터록 같은 안전 장치조차 설치하지 않았다. 인터록을 설치해 자주 기계가 멈추면 빵 생산량에 차질을 빚기 때문이라고 동료들은 말했다.

근로감독관 늘었지만 산재 줄었나

SPC 초과 야근 폐지로 노동자는 위험한 환경은 바뀌지 않는데 임금이 줄어든 채 일할 가능성이 크다. 이날 이 대통령은 또 “300명 근로감독관 증원도 신속히 해 달라”고 주문했다. 우리나라 근로감독관은 지난해 기준 약 3100명으로 노동자 1만 명당 1명인 국제노동기구(ILO)의 권고를 웃돈다. 문재인 정부 동안 근로감독관을 1000명이나 늘렸지만 산재는 줄어들지 않았다. 2020년 경기 이천 물류센터 공사장 화재(38명 사망), 지난해 경기 화성 리튬배터리 공장 폭발(23명 사망) 등 대형 산재가 끊이지 않았다. 이 정도면 늘어난 근로감독관은 놀고 있다는 뜻인가.

30년 경력 건축 감리사인 유모 씨는 근로감독관 증원을 두고 “‘사진 찍어와라’ ‘공문 달라’ 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안전 담당자가 현장 대신 서류만 쳐다본다”며 “실무형 안전이 아니라 서류형 안전만 양산하면 사고는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소년공’으로 10대를 보냈고 산재를 경험한 이 대통령이 “죽지 않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한다. 정말 진심일 것이다. 하지만 중대재해처벌법처럼 모호한 법령으로 겁박하거나, 근로감독관 같은 사후 행정으로는 비용을 절감하려는 기업의 본능을 제어할 수 없다. 현장에선 차라리 안전 관리 인력을 지원해달라고 한다. 정부가 정의감만 넘쳐서는 풀 수 없는 문제란 얘기다.

#SPC삼립#산업재해#야간근무#근로감독관#중대재해처벌법#노동환경#안전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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