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잉 고잉 곤[박연준의 토요일은 시가 좋아]〈1〉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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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가 나를 오린다
햇빛이 그림자를 오리듯

오려낸 자리로
구멍이 들어온다
내가 나간다

새가 나를 오린다
시간이 나를 오리듯

오려낸 자리로
벌어진 입이 들어온다
내가 그 입 밖으로 나갔다가
기형아로 돌아온다

다시 나간다

내가 없는 곳으로 한 걸음
내가 없는 곳으로 한 걸음

새가 나를 오리지 않는다
벽 뒤에서 내가 무한히 대기한다

―김혜순(1955∼)


고잉 고잉 곤! 이 시는 제목부터 이미 시다. 죽은 사람을 부르는 소리 같기도 하고 한 존재가 아득한 곳으로 날아가는 소리 같기도 하고, 가다 헤매는 소리 같기도 하다. 놀라운 건 날아가는 새의 모습을 형상화한 문장에 깃든 음악이다. 모든 좋은 시에는 틀림없이 음악이 있다. 음악이 언어를 지휘하고 언어가 음악을 연주한다. 납작하게 눌린 글자들에서 음악을 탄생하게 하는 것. 그것을 가장 잘하는 시인은 김혜순이다. 그의 시는 주술적인 힘이 있다. 읽는 이에게 주문을 걸고, 세상의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이 시가 어려운가? 있는 그대로 감각해 보라. 죽은 자는 오려진 자다. 산 자도 자주 오려진다. 오려진 나, 그 사이로 새가 들고 난다. 새가 오려진 우리를 대신해 그 자리에 머문다. 오려지는 존재는 오려지다 오려지다 어디로 가나. 시인은 문 뒤에서 ‘대기’하는 존재를 상기시킨다. 죽음의 다른 얼굴은 문밖에서 대기하는 자다. 오려진 자는 세상과 섞일 수 없을 테고 날갯짓을 할 수 없을 테다. 영영 ‘가버린(gone)’ 존재가 된다.

며칠 전 집 앞에서 다리를 다친 새를 보았다. ‘고잉 고잉 곤!’ 일어나서 날아갈 수도, 아닐 수도 있는 일. 자꾸 오려지는 존재들의 일이다.

#김혜순#시#고잉 고잉 곤#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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