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신광영]89년 만에 제 이름 찾은 ‘기테이 손’과 ‘쇼류 난’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8월 13일 23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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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8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는 시상식 직후 일본 측이 마련한 격려 만찬에 가지 않았다. 대신 베를린의 한 두부 공장으로 향했다. 교민 10여 명이 조촐한 축하 파티를 열어줬다. 음식이라곤 공장에서 만든 두부와 김치가 전부였다. 공장 벽엔 태극기가 걸려 있었다. 조금 전 시상식에서 가슴의 일장기를 월계수로 가렸던 손 선수는 그날의 소회를 훗날 자서전에 적었다. “잃었던 조국의 얼굴을 대하는 것 같아 몸이 부르르 떨렸다. 감시의 눈을 피해 태극기가 살아 있듯 우리 민족도 살아있단 확신이 들었다.” 그 두부 공장의 주인은 안중근 의사의 사촌 동생 안봉근이었다.

▷승전보를 안고 돌아온 24세 청년은 방송에서 일본을 찬양하는 인터뷰를 강요당했다. “저는 손기정입니다. 이 승리는 내 개인의 승리가 아니라 일본 국민의 승리라고 하겠습니다.” 그의 유품인 한 음반에 이런 육성이 담겨 있었는데 “크게 읽어, 크게 읽어”라고 지시하는 목소리가 함께 녹음됐다. 손 선수의 당시 인터뷰는 말한 것이 아닌 읽은 것이었다.

▷그해 베를린 올림픽 주경기장엔 ‘승리자의 벽’이 들어섰다. 메달리스트들의 이름과 국적이 하나하나 새겨졌다. 손 선수는 ‘마라톤 우승자 일본인 손’으로 각인됐다. 그 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홈페이지에도 국적은 일본, 이름은 기테이 손(Kitei Son)으로 등재됐다. 우리 국회와 체육계의 줄기찬 수정 요구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IOC는 손 선수를 바꿔주면 식민 지배를 겪은 다른 국가들도 줄줄이 수정을 요구할 수 있다며 난색을 표했다.

▷40여 년에 걸친 끈질긴 설득에 IOC도 결국 화답했다. 최근 홈페이지 선수 명부에서 손 선수의 일본식 이름 바로 아래 본명과 한국 국적이 병기된 것이다. 출전 당시 강제로 일본 국적과 이름을 써야만 했다는 점도 명시됐다. 소개 글에는 손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에서 한국 이름으로 서명했고, 출신국을 묻는 질문에 한국이라고 답하며 별개의 나라라고 강조했다는 설명이 담겼다. 손 선수와 나란히 출전해 동메달을 땄던 남승룡 선수도 일본식 이름 ‘쇼류 난(Shoryu Nan)’ 아래에 본명과 한국 국적이 병기됐다.

▷2002년 별세한 손 선수는 “나를 기억하게 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강요된 국적과 이름을 걷어내고 한국인 손기정으로 기록되기를 그만큼 염원했다. 김구 선생은 1946년 8월 손기정 우승 10주년 행사에서 “나는 손 군 때문에 세 번 울었다”면서 이런 말을 했다. “그의 우승 소식에 감격해서 울었고, 헛소문이지만 그가 일본군이 되어 전사했다는 소식에 슬퍼서 울었고, 광복 후 그와 다시 만나 기뻐서 울었다.” 김구 선생이 살아있었다면 손 선수가 89년 만에 제 이름을 되찾은 게 후련해서 또 울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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