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의 무비홀릭]세상에서 첫째가는 무서운 놈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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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발레리나’. 화염방사기를 레이저처럼 쏴댄다. 판씨네마㈜ 제공
이승재 영화평론가·동아이지에듀 상무
이승재 영화평론가·동아이지에듀 상무
[1] “너희들은 내일만 보고 살지? 내일만 사는 놈은 오늘만 사는 놈한테 죽는다. 나는 오늘만 산다. 그게 얼마나 X 같은 건지 내가 보여줄게.” 영화 ‘아저씨’(2010년) 속 주인공 원빈의 명대사예요. 맞아요.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놈은 검정 우비를 입고 도끼를 든 채 달려오는 놈이 아니에요. 전신에 용 문신을 한 놈도 아니고요. 998cc 경차를 몰고 경부고속도로를 시속 180km로 달리며 칼치기를 하는 ‘오늘만 사는 놈’이 최고로 무섭죠.

[2] ‘존 윅’ 시리즈의 스핀오프인 ‘발레리나’(이달 6일 개봉)의 주인공 ‘이브’도 심히 무서워요. 이 여성 킬러는 “판을 바꿔. 여자처럼 싸워”라는 스승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해 보이는데, 총을 쏘고 도끼로 찍고 일본도로 베어버리는 건 기본이고요. 심지어 깨진 접시로 죽이고, 피겨 스케이트 날로 죽이고, 적의 입에다 수류탄을 넣은 뒤 터뜨려 죽이고, 폭탄주 50잔 먹고 가로수에다 직선으로 토하는 아저씨처럼 화염방사기를 레이저처럼 쏴대며 상대를 태워 죽여요. 총을 칼처럼 쓰면서 주짓수와 유도를 뒤섞은 분절적 무술을 통해 근접전의 신박한 액션 스타일을 구축한 선배 킬러 존 윅과 달리, ‘여자처럼 싸운다’란 언명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모든 사물을 무기로 삼는 ‘개싸움’이란 사실을 이브는 알려주죠. 그래도 이브는 “아빠를 죽인 놈들에게 복수한다”는 고리타분한 구실이라도 있다는 점에서, 자신의 반려견을 죽였다는 이유로 시리즈를 통틀어 290명을 죽이는 존 윅보단 정의롭지 않나, 하는 만고에 쓸데없는 생각도 해봐요.

[3] ‘프렌치 스릴러’의 전설인 클로드 샤브롤 감독의 ‘지옥’(1994년)에는 가일층 무서운 놈이 나와요. 의처증 영화의 고전이랄 수 있는 이 영화의 주인공은 ‘영끌’로 호텔 사업을 시작한 가정적인 남편(프랑수아 클뤼제). 경영 압박에 시달리던 그는 점차 아름다운 아내(에마뉘엘 베아르)의 외도를 의심하는 망상장애 환자로 변해 가죠. 이 미친 남편은 밤에 아내가 침대에서 렘(REM)수면을 하며 꿀잠 자는 모습을 보고는 “자면서 눈알 굴리는 걸 보니 다른 남자 생각했니?”라며 아내를 다그쳐요. 남편이 운영하는 리조트의 그림 같은 풍광과 남편의 괴물 같은 내면이 아이러니하게 대비되는 이 영화의 최고 묘미는 마지막 장면. ‘끝’이란 뜻의 프랑스어 ‘FIN’ 대신 ‘SANS FIN’이란 자막으로 허를 찌르죠. SANS FIN(끝이 없음), 의처증은 영원히 현재진행형임을 시사하죠.

뛰어난 성취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두 가지가 퍽 아쉬워요. 첫째는 퇴적된 경영 스트레스가 의처증으로 이어진다는 설정, 둘째는 의처증에 고통받는 아내 역에 이름부터 뇌쇄적인 에마뉘엘 베아르를 캐스팅했단 점이죠. 의처증을 마치 ‘이유 있는 광증’으로 오해하도록 만드니까요. 힘든 남편이 예쁜 아내를 두면 의처증이 생길 법도 하다니, 이게 말이에요 방귀예요?

[4] 내 안에 숨은 괴물적 자아야말로 누구도 통제 못 할 무서운 놈일지 몰라요. 클로드 샤브롤과 로베르 브레송을 미친 수준으로 변주하는 프랑스 알랭 기로디 감독의 문제작 ‘호수의 이방인’(2013년)은 외딴 호숫가가 배경이에요. 해가 뜨면 이곳엔 남성 동성애자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모여들어요. 그들은 서로의 나체를 구경하면서 취향 저격인지 가늠하고, 눈이 맞으면 곧장 수풀로 들어가죠. 배 나오고 못생겨서 선택받지 못한 남자는 남들의 성행위를 우두커니 내려다보면서 수음하는 것으로 갈음하지요. 주인공 ‘프랭크’는 얼굴 잘생기고 몸은 더 잘생긴 옴 파탈 ‘미셸’에게 한눈에 반해 몸을 섞는데, 원색적인 동성애를 마치 토스트에 딸기잼 발라 우유랑 먹는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묘사하는 이 기이한 영화는 순식간에 스릴러로 질주해 버려요. 알고 봤더니, 호숫가는 포식자가 초식동물들을 잡아먹는 세렝게티와 다름이 없는 약육강식 생태계였어요. 미셸은 파트너에게 싫증을 느끼면 호수에 익사시킨 뒤 또 다른 파트너를 찾아 나서는 데이트 살인마였던 거죠. 질겁한 프랭크는 “프랭크, 프랭크” 하고 자기 이름을 부르며 칼 들고 쫓아오는 미셸을 피해 사력을 다해 수풀로 도망쳐요. 호숫가는 이윽고 밤의 어둠에 묻히고, 안전해진 프랭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죠. 그런데, 다음 장면이 뭔지 아세요? 이내 미셸이 그리워져 “미셸, 미셸” 하고 살인마의 이름을 목이 터져라 외치며 밤새 찾아 헤매는 프랭크의 모습으로 막을 내려요. 너와 한 번 더 관계를 할 수 있다면 네 손에 난자당해 죽어도 좋아, 이런 투로 말이에요. 먹이가 될 줄 알면서도 암컷에게 달려드는 수컷 사마귀와 진배없죠.

내 안의 본능은 호수의 이방인처럼 불쑥 내 앞에 나타나지만, 결국엔 나의 주인이 돼버리고 말아요. 그래요. 세상에서 첫째가는 무서운 놈은 나도 어쩔 수 없는 나, 아니 나입니다.

#영화#아저씨#존 윅#발레리나#지옥#호수의 이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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