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영 역사작가신라 진흥왕은 영토를 크게 넓힌 정복 군주였다. 그는 확장된 땅을 직접 방문하고 그곳에 비석을 세웠다. 창녕,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에서 각각 비석이 발견됐다. 창녕비를 제외하면 다른 세 비석은 보통 사람들이 접근하기 힘든 위치에 있다. 왜 이런 곳에 비석을 세웠는지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북한산에 있는 순수비는 비봉 위에 있는데 올라가는 길이 없는 바위 위에 세워져 있다. 황초령비는 함흥 북쪽의 해발 1206m 황초령에 있다.
황초령비에 새겨진 연도는 진흥왕 29년(568년) 8월 21일(음력)이다. 마운령비도 비문을 통해 같은 때에 세워진 것을 알 수 있다. 북한산비는 연도 부분이 없어졌지만 비석이 황초령비, 마운령비와 동일한 규격인 것으로 보아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비석들은 신라의 서라벌에서 제작돼 각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산비는 무학대사의 비석이다. 마운령비는 남이장군이 세운 비석으로 알려졌는데, 황초령비는 그래도 일찍 탁본이 만들어져 신라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처음 이 비석의 탁본을 뜬 사람은 임진왜란 때 탄금대에서 전사한 신립이었다. 신립이 북병사로 있을 때 황초령비의 탁본을 떴고, 선조의 손자인 낭선군은 ‘대동금석서’에 탁본을 수록해 세상에 전했다. 영조 때에는 함경도관찰사 유척기가, 정조 때는 함흥부사 윤광호가 탁본을 떴다 하니 그때까지는 비석이 남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비석이 높은 곳에 있고 탁본을 뜨는 일이 번거로웠던 탓인지 백성들이 비를 파묻었다고 한다. 떨어뜨려 깨뜨린 뒤에 파묻은 것이다. 정조 14년(1790년)에 함흥판관 유한돈은 홍양호의 부탁으로 비석을 찾아봤는데 부서진 한 조각만 간신히 찾아냈다.
북한산비가 무학대사비가 아닌 진흥왕의 순수비란 사실을 밝혀낸 김정희는 황초령비에도 관심을 가졌다. 김정희는 순조 32년(1832년)에 친구 권돈인이 함경도관찰사로 부임하자 비석을 찾아봐 달라고 부탁했는데, 두 조각을 찾아내 관아로 옮겨 놓았다. 김정희는 이어 철종 3년(1852년)에 후배 윤정현이 함경도관찰사로 부임하자 비석을 원래의 위치로 돌려 놓으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황초령 위로 올리기는 어려웠는지 황초령 아래 중령진에 비각을 지어 비석을 보관했다. 이로 인해 동네 지명도 진흥왕의 이름을 딴 진흥리가 됐다. 1931년에 또 한 조각이 발견돼 비석은 세 조각으로 복구됐다.
현재 이 비석들은 북한 함흥역사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일본의 식민사학자 쓰다 소키치는 “신라가 이렇게 북방까지 진출했을 리 없다”며 황초령비를 위조품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1929년 황초령보다 북쪽에서 마운령비가 발견되면서 이 주장은 잘못됐음이 밝혀졌다.
황초령비의 역사는 단순한 석비 발견의 과정이 아니다. 시대에 따라 기록이 보존되기도, 사라지기도 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사례다. 누군가의 호기심과 집념, 그리고 우연이 맞물릴 때 역사는 다시 빛을 본다. 김정희의 깊은 관심 덕분에 황초령비는 사라지지 않고 전해질 수 있었다. 역사는 발견 그 자체가 끝이 아니다. 세대를 거듭한 지속적인 관리 속에서 완성된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