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블레이크는 영국의 근대 시인이자 화가이자 판화가였다. 그는 평생 종교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주제에 관심을 뒀는데, 말년에는 성경 내용을 재해석한 작품을 많이 제작했다. ‘아담과 이브에게 발견된 아벨의 몸’(1826년·사진)은 그가 죽기 1년 전에 그린 것으로,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묘사하고 있다.
카인과 아벨은 아담과 이브 사이에서 태어난 형제다. 형 카인은 농부였고, 동생 아벨은 양치기였다. 신이 아벨의 제물만 받고 카인의 제물을 받지 않자 화가 난 카인은 동생을 들로 데리고 가서 죽여버렸다. 성경에 등장하는 최초의 형제간 살인 사건이었다. 많은 화가들이 형이 동생을 죽이는 장면을 묘사했지만, 블레이크는 부모가 아벨의 시신을 발견해 슬퍼하는 장면을 그렸다. 동생에 대한 질투와 시기로 살인을 저지른 카인은 신의 저주를 받고 쫓겨나고 있다. 아니 스스로 괴로워하며 도망치고 있다. 이브는 죽은 아벨의 몸 위로 고개를 푹 숙인 채 흐느끼고 있다. 그녀의 몸짓은 절규를 넘어 죄책감과 신에 대한 원망을 표출하는 듯하다. 뒤에서 무릎을 꿇은 아담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도망치는 큰아들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다. 카인의 머리 위로 검은 구름이 몰려온다. 붉은 태양은 줄무늬 바람에 가려졌다. 앞으로 그가 살아가면서 겪을 고통과 풍파를 예견하는 듯하다. 일종의 죗값인 셈이다.
블레이크는 살해의 장면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대신, 폭력이 남긴 흔적과 비극 뒤에 남겨진 이들의 고통에 초점을 맞췄다. 폭력은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삶까지도 황폐하게 만들고 깊은 슬픔과 죄책감을 남긴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단순히 성경 이야기에 관한 그림이 아닌 끔찍한 죄악이 초래하는 고통에 대한 한 예술가의 신학적·철학적 고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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