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의 이 선택은 한국 해운업의 운명을 갈랐다. 극심한 해운업 불황에 직면한 정부와 채권단은 공적자금을 두 회사에 동시에 투입할 수는 없다고 봤다. 정부는 현대상선을 살리기로 했다. 지금의 HMM이다. 당시 판단에는 그 나름의 논리도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한국 해운업은 당시의 시장 점유율을 회복하지 못했고, 글로벌 네트워크와 인력을 잃었다. 그래서 여전히 ‘한진을 살렸어야 했던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산업 구조조정은 늘 고통스러운 선택이고, 그 선택이 옳았는지는 시간이 오래 지나야 드러난다. 산업 재편이 어려운 이유다. 1999년 ‘반도체 빅딜’도 그랬다. 메모리 공급 과잉발 불황에 정부와 당시 전국경제인연합회 주도로 현대전자가 LG반도체를 인수하기로 했다. SK하이닉스의 전신 이야기다. 삼성과 더불어 2강 체제를 만들어 세계적 경쟁력을 키우자는 취지였는데, 빅딜 후 20여 년이 지나서야 그 취지가 빛을 발하게 됐다.
정부 석유화학 재편 칼 뽑았지만
이제 구조조정의 칼끝은 석유화학 산업으로 향하고 있다. 정부는 20일 석유화학 산업 재편 시동을 걸었다. 울산, 여수, 대산 단지를 중심으로 국내 석유화학 기업 10곳의 나프타분해시설(NCC) 생산 규모를 25% 줄이겠다고 밝혔다. ‘선(先) 자구 노력, 후(後) 정부 지원’ 방침도 밝혔다.
사실 석유화학 구조조정 논의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1990년대에도, 2000년대에도, 2010년대에도 나왔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왜일까. 2, 3강 체제인 반도체나 해운업과 달리 석유화학은 밸류체인이 복잡하고 지역별 단지별로 상황이 다르다. 쉽게 손댈 수 없는 구조라는 얘기다.
정부도 복잡한 석유화학 산업의 특성을 알기에 기업 자구책이 우선이라고 본 것 같다. 정부가 과거처럼 민간 기업에 통폐합을 요구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기업 자체 재편안만 기다리기엔 상황이 너무 급박하다. 모든 구조조정 사례가 보여주는 공통점은 타이밍이 가장 중요하다는 점이다. 한진해운도 파산 직후에야 개입이 이뤄졌기에 회생 불능의 상황에 몰렸다.
기업들은 과거 정부 주도 구조조정에서 ‘버티면 산다’는 교훈도 봤다. 업황이 반등하면 버틴 자가 독점적 지위를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끝없는 치킨게임이 이어져 왔고, 결국 이대로라면 ‘3년 안에 석화기업 50%가 사라질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올 지경이 됐다. 스스로 재편할 수 있었다면, 중국이 공격적으로 설비 증설을 시작한 2021년 무렵에 시작됐을 것이다.
단순한 업황 사이클 문제가 아니다
게다가 이번 석화 위기는 과거와 다르다. 과거 반도체, 해운, 조선업의 위기가 모두 업황 사이클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면, 이번에는 중국발 구조적 공급 과잉이라는 전례 없는 위기가 문제다. 중국의 에틸렌 자급률은 100%에 도달해 가고 있고, 3년쯤 뒤엔 자국 수요를 모두 감당하고도 1500만 t 이상이 남게 생겼다.
한 재계 관계자는 이를 ‘플랫폼 독점’ 같은 중국 제조업의 특성이라고 표현했다. 미국이나 일본이 제조업 주도권을 쥐던 시절에는 세계 생산량을 모두 감당할 수 없어 한국 등 2, 3위 업체의 역할이 남았지만 중국 제조업은 전체 시장을 독점하려 한다는 것이다. 마치 구글이나 메타가 시장을 싹쓸이하듯, 이미 전 세계 철강과 석유화학을 휩쓸고 있다. 이제는 조선업까지 넘보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석유화학 구조조정은 앞으로 이어질 중국발 공급 위기에 우리가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한 모범 사례가 돼야 한다. 정부가 주도권을 쥐고 산단별 감축안과 그에 따른 구체적 유인책을 내놔야 한다. 고통스러운 인력 감축과 사회적 갈등이 필연적이라는 점도 인정하고, 이에 맞는 대안도 준비해야 한다. 이번 산업 재편에 한국 제조업의 명운이 걸려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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