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김윤종]99층, 샤넬백 프러포즈와 분노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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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종 사회부장
김윤종 사회부장
“유니클로 입던 영부인이 ‘명품 좀 필요할 것 같다’고 했다.”

김건희 여사에게 5000만 원대 시계를 건넨 사업가 서모 씨가 언론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서 씨에 따르면 2022년 9월 만난 김 여사는 “외국 정상 부인들은 치장을 많이 한다. 나도 이런 게 좀 필요하다”는 취지로 말했다고 한다. 이에 서 씨가 바쉐론 콘스탄틴 시계를 소개해줬다는 것이다. 이 시계를 비롯해 2000만 원 이상의 샤넬백, 각각 6000만 원대인 반클리프아펠과 그라프 목걸이, 3000만 원대 티파니앤코 브로치 등 김 여사가 받았다는 명품에 대해 특검 수사가 진행 중이다. 일각에선 “금품 수수와 청탁이 문제의 본질이지만, 영부인조차 명품으로 자존감을 채우려는 듯한 모습에서 우리 사회의 단면이 보이는 것 같아 씁쓸하다”란 지적이 나왔다.

필수 의례라는 명품 프러포즈 이면

5성급 호텔에서 명품 예물을 주고받는 프러포즈가 한국 젊은 세대에게 필수 의례로 여겨진다는 연구결과까지 최근 발표되며 명품 이슈가 확산됐다. 성신여대 연구팀이 인스타그램 게시글을 분석한 결과, 젊은층이 프러포즈 공간으로 가장 선호하는 장소는 5성급 호텔이었다. ‘99층’, ‘93층’ 등 구체적 층까지 SNS에 올린다고 한다. 고가의 특정 호텔(시그니엘 서울)임을 자랑하려는 의도다.

예물로는 샤넬백과 반클리프 목걸이가 가장 많이 등장했다. 연구팀은 “프러포즈가 명품 브랜드를 과대 포장하고 진열하는 행위로 변질됐고, 청년들은 상대적 빈곤감에 시달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연구를 접한 청년들은 “민생소비쿠폰도 아껴 쓰는데 박탈감이 크다”, “결혼은 다음 생에서” 등의 반응을 보였다. 청년층의 47%가 SNS에서 자신보다 잘사는 이들을 보며 상실감을 느낀다는 설문 결과도 있다.

개인적으론 올해 일어난 강력 사건들이 머리를 스쳤다. 33세 김성진은 4월 서울 미아동 한 마트에서 흉기를 휘둘러 1명을 숨지게 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는 “그냥 누군가를 죽이고 싶었다”고 했다. 20대 김모 씨는 5월 서울 영등포 일대에서 부탄가스 폭탄을 들고 “마음에 안 드는 놈들, 다 죽여버린다”며 행인들을 위협했다.

모두를 경악하게 한 2월 초등생 살인 사건에도 유사한 맥락이 담겨 있다. 초등생을 살해한 교사 명재완에 대한 경찰 프로파일링 결과 우울증 등 정신질환은 직접적 관련이 없었다. 경찰은 가정과 직장 생활 속 불만에서 비롯된 스트레스와 분노가 외부로 표출된 범죄로 결론지었다.

과시 사회 박탈감, 흉기 되지 않게 해야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의 범죄 분석에선 이런 사건들을 ‘이상동기 범죄’로 분류한다. 세부 내용은 다르지만 구조는 비슷하다. 취업 실패나 실직, 가정불화 등 좌절을 겪으면서 ‘열심히 사는데,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다’는 피해의식이 커진다. 화가 점차 눈덩이처럼 커지는 분노의 스노볼(Snowball) 효과가 발생한다. 임계점을 넘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동기로 범죄를 저지른다. 이때 분노를 키우는 촉매제가 유독 심한 우리 사회의 과시와 비교 문화, 이에 따른 박탈감으로 분석되고 있다.

국내 이상동기 범죄는 지난해 42건으로, 최근 5년간 383건이나 발생했다. 이 중 살인 및 살인 미수는 97건(24.5%). 한번 발생하면 치명적 피해가 생긴다는 것이다. 범인을 괴물 취급하며 개인의 일탈에만 초점을 맞춰서는 이상동기 범죄에 대한 해결책을 찾기 어렵다. 수사기관의 대응력 강화 외에 실패한 사람에게 낙오자 낙인 대신 재도전 기회를 주는 등 사회 전반의 지원 대책이 필요하다.

명품을 사는 것은 개인의 자유다. 하지만 명품이 단순한 사치품을 넘어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나누는 기준처럼 받아들여지는 환경, 겉으로 드러나는 물질만으로 사람을 무시하는 풍토는 사회를 병들게 한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든 이유 없이 누군가를 공격하는 흉기로 되돌아 온다.

#명품 프러포즈#분노범죄#과시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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