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이치에 맞지 않는 엉뚱한 말을 가리켜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라고 한다. 이 표현에서 ‘씻나락’은 볍씨를 뜻한다. 귀신이 제사상 위의 귀한 알곡 쌀밥을 먹지 않고 볍씨를 먹고 있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빗댄 것이다.
씻나락에서 ‘나락’은 신라의 방언이었다. 조선 후기의 기록인 ‘동의록’에는 벼의 겉곡식을 나락이라고 했다고 쓰여 있다. 신라시대에 관리들에게 주는 급료를 알곡식 대신에 껍질이 붙은 겉곡식으로 줬다는 것에서 유래한 말로, 원래 말은 ‘신라의 급료’라는 뜻의 ‘나록(羅祿)’이었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쌀은 귀족층만 먹는 주식이었다. 고구려를 비롯한 북쪽에서는 좁쌀을 쌀이라 했고, 볍쌀은 ‘입쌀’ 또는 ‘닛쌀’이라고 할 정도로 귀했다. “쌀을 밟으면 발이 삐뚤어진다” “키질하다 쌀을 날려 버리면 남편이 바람난다” 등의 금기는 쌀이 그만큼 귀해서 나온 말이었다. 지금은 잊혀졌지만 신줏단지에 햅쌀을 담아 안방의 천장에 모시던 것은 오랜 풍습이었다.
옛날에는 솥에 직접 불을 때 밥을 했다. 펄펄 끓은 후 김이 나고 습기가 남아 있을 때 약한 불로 뜸을 들인 밥은 ‘진밥’이라고 해서 집안 어른들이 먹었다. 뜸을 들이지 않고 한번에 지은 밥인 ‘고두밥’은 종이나 머슴들이 먹는 밥이었다. 조선 순조 때 중국 사신으로 갔다 온 박사호는 자신이 쓴 사행기 ‘응구만록’에서 중국 쌀밥에 대해 “음식은 정결하고 산뜻하나 밥은 고두밥 같은 것이 우리나라 밥맛보다 썩 못하다”며 양국의 밥 짓는 방식이 서로 다름을 밝혔다.
쌀은 약으로도 처방됐다. 조선 후기에 편찬된 농업·가정생활 백과사전인 ‘산림경제’에는 매독에 걸린 환자에게 쌀밥과 수은이 들어 있는 ‘경분’이란 약물을 함께 먹인 오리를 특효약으로 처방한 기록이 있다. 오리를 굶긴 뒤 쌀밥과 경분을 섞어 먹여 수은 독을 약하게 만든 다음 삶아 먹으면 매독 치료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
조선 왕실에선 요즘처럼 무더운 여름에 설사나 배탈이 났을 때도 쌀을 끓인 미음을 처방한 기록이 있다. 영조 1년의 기록을 보면 영조가 빙차(氷茶)를 자주 마셔 복통과 설사가 거듭되자 신하들이 “빙차는 잠깐은 상쾌하고 시원한 것 같지만 지극히 해롭습니다. 북경 사람들은 여름이건 겨울이건 뜨거운 물을 마시기 때문에 배탈이 없다. 일단 뜨거운 물을 드시는 게 좋겠다”고 진언한다. 어의들은 일단 뜨거운 물로 임금의 복통과 설사를 잦아들게 한 후 미음으로 속을 달랬다. 약물로 설사를 강제로 막은 게 아니라 위장에 온기가 돌아올 때까지 속에 부담을 주지 않고 기다리는 지혜가 돋보이는 치료법이었다.
어릴 때 칼국수나 고기를 먹고 나면 어머니는 반드시 밥을 한술 입에 떠먹였다. 쌀의 한자어인 ‘미(米)’는 사방팔방으로 흩어지는 모양새이지만, 중심과 균형이 딱 잡혀 있다. 흙에서 나온 것들은 모두 다른 모습이지만 썩으면 다시 돌아와 흙이 되듯, 우리네 조상들은 쌀이 그 균형과 조화의 힘으로 편벽되거나 강한 속성을 완화하는 중용의 음식임을 잘 알고 있었다.
벼는 봄에 심어 여름에 성숙하고 가을에 거두니 자연 질서에 부합한다. 가을에 심어 한겨울을 거치며 자라는 보리는 외부가 차갑고 내부만 따뜻하지만, 벼는 겉과 속이 똑같다. 한의학에서 쌀을 그 맛뿐만 아니라 몸과 마음의 균형을 잡는 데 중요한 음식으로 평가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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