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에서 막춤까지… ‘대충’이 아닌 ‘대강’이 만들어내는 한국적 힘[김대균의 건축의 미래]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8월 27일 23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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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선생 말한 한국의 막문화
투박하지만 진솔함, 생명력 담겨… 일단 시작하면 우연한 즐거움 줘
큰 줄기 잡고 자연의 흐름 따르는 ‘대강’ 정신은 대충하는 것과 달라
뜨개질, 도자기, 건축에도 적용돼


김대균 건축가가 설계한 서울 강남구 도산공원 인근의 한 글로벌 향수 브랜드 건물. 큰 질서를 잡은 뒤 하나하나 구운 벽돌, 시간을 들여 연마한 금속 가구, 갈고 간 미장 바닥 등 정성껏 재료를 다루는 ‘대강’의 철학을 적용하자, 한국성을 강조하지 않아도 충분히 한국적인 공간이 완성됐다. 김대균 건축가 제공
김대균 건축가가 설계한 서울 강남구 도산공원 인근의 한 글로벌 향수 브랜드 건물. 큰 질서를 잡은 뒤 하나하나 구운 벽돌, 시간을 들여 연마한 금속 가구, 갈고 간 미장 바닥 등 정성껏 재료를 다루는 ‘대강’의 철학을 적용하자, 한국성을 강조하지 않아도 충분히 한국적인 공간이 완성됐다. 김대균 건축가 제공
《한국의 문화적 에너지 ‘막문화’

‘막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 경우가 있다. 생각이 많을 때 일단 저질러서 막 하다 보면 우연한 도움을 얻기도 하고, 생각이 정리되면서 활로를 찾게 된다. 하지만 막 해선 안 되는 때도 있다. 막말과 같이 어떤 경우 ‘막 하는 것’은 되돌릴 수 없는 실수나 사고를 일으킨다. 그럼 ‘막’은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좋을까?》

김대균 건축가·착착스튜디오 대표
김대균 건축가·착착스튜디오 대표
고 이어령 선생은 생전 ‘막문화’를 강조했다. 이 선생은 막문화를 일반 대중이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낸 소박하고 다듬어지지 않은 문화 현상이라고 정의했다. 접두어 ‘막’이 붙는 막사발, 막걸리, 막국수 등은 겉모습이 서민적이거나 투박하지만, 그 안에는 진솔함과 생명력이 담겨 있다. 그는 막문화를 두고 한국인의 잠재력을 담은 상징적인 한국의 문화 에너지라고 했다.

전통적으로 막걸리나 막국수, 막회는 그 지역의 재료를 이용해서 신선하게 즉시 만들고 바로 소비된다. 생산 과정에서도 재료의 낭비 없이 정제를 최소화해서 재료가 가진 다양한 본연의 맛과 독특한 질감이 난다. 도정을 많이 한 술이나 숙성회와는 다른, 날것이 가진 장점을 극대화한 것이다. 비빔밥 역시 큰 양푼에 막 비빈 것이 맛있는 이유도 같다. 신선한 재료들이 입안에서 균질한 맛을 내는 것이 아니라 한 입 먹을 때마다 다양한 식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즉 막걸리, 막국수 등에는 신선함, 지역성, 재료를 알뜰하게 쓰려는 마음이 담겼고 먹거나 사용하는 동안 느끼는 우연함이 주는 즐거움이 있다.

‘전국노래자랑’이나 관광버스에서는 독특한 한국적 상황을 볼 수 있다. 바로 막춤이다. 우리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유교 문화가 600년 이상 지속된 데다 평소 교양으로 춤을 배우는 문화가 없는 나라에 살고 있다. 그런데 흥에 겨우면 어깨를 들썩이다 결국 흥에 몸을 맡겨 모두가 하나 되는 광경은 우리 민족의 무구한 DNA라고 할 수밖에 없다. 좋아서 즐거워서 몸이 막 움직이게 되는 지경은 가장 원초적인 인류 문화의 시작점이자 세계가 공유할 수 있는 교차점이다.

육체노동을 낮게 보는 경향은 육체적으로 힘든 것을 피하고 싶은 인간의 본능과 연결돼 있다. 하지만 고상하게 보이는 공예나 미술, 음악도 실상은 놀랍게도 육체노동에 가깝다. 제와장(製瓦匠)은 매번 정신을 가다듬고 신념과 각오를 갖고 기와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하자 없이 잘 만들어 좋은 곳에 사용됐으면 하는 바람은 있지만, 기와를 만드는 일 자체는 그저 일상이고 고된 막노동이다. 오랜 시간 수련으로 만들어진 막노동은 생각을 지우고 세상의 진리와 만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지름길이다. 세간의 시선은 부정적일지도 모르지만 노동은 논리나 생각을 넘어 인간의 근본 활동 중 하나다.

뭔가 구체적이지 않을 때 쓰는 ‘대강’은 한자로 ‘大(큰 대)’와 ‘綱(벼리 강)’을 쓴다. 벼리는 그물의 줄기가 모이는 곳이자 그물 줄기의 시작점이 되는 부분을 뜻한다. 이 때문에 법도나 사물의 총체적 규율 등을 의미할 때 ‘벼리’라는 단어를 상징적으로 쓴다. 뜨개질을 할 때도 시작만 잘 잡히면 그다음은 일사천리로 할 수 있다. 도자기를 만들 때도 그렇다. 흙을 발효한 후, 고운 흙 입자를 얻는 수비 과정에 필요한 맑은 물과 가마에 높은 온도를 유지할 수 있는 나무가 준비되면 흙을 형성해 도자기를 굽는다. 재료를 구하는 과정과 도자기를 성형하는 과정에는 모든 정성을 다하지만 가마 안에 도자기가 들어가 불을 넣기 시작하면 정성껏 불을 살피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기다릴 뿐이다.

이것을 일제강점기 미학자 야나기 무네요시는 ‘임운무애(任運無碍)’라고 했다. 정성을 다한 이후에는 나머지 임무를 운에 맞기고 구애됨이 없는 임운무애는 대강의 정신과도 같다. 대강 하는 것은 자연의 법칙을 큰 틀에서 이해하고 전체를 조망하는 방식이지, 대충 하거나 소심하게 하나부터 열까지를 모두 제어하면서 일하는 것이 아니다. 만드는 모든 것을 인간이 제어할 수 있다는 생각은 근대 산업사회가 만든 오만이다. 대강은 자연과 함께하면서 세상을 넓게 보고 진리를 따르는 실천적이고 실존적인 사고이자 행동이다. 이것이 이 선생이 말한 막문화의 바탕일 것이다.

얼마 전 서울 강남구 도산공원 근처에 영국의 글로벌 향수 브랜드 건물을 설계했다. 극도로 섬세한 향을 다루는 해외 브랜드, 그 정체성을 담는 공간의 방향성을 설정하는 것은 상당히 난해한 일이었다. 이때 생각한 것이 대강의 철학이다. 비싼 공산품을 쓰는 것이 아니라 정성껏 하나하나 구운 벽돌, 시간을 들여 연마하고 손으로 정성껏 도장해 만든 금속 가구, 오랜 세월을 함께할 수 있도록 갈고 갈아서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미장 바닥, 한옥에서 쓰던 기둥과 보를 정성껏 다듬고 이어 세운 목구조물 등 모든 재료는 하나부터 열까지 설계 도면이 조정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큰 질서를 잡고 정성껏 준비한 이 공간은 특별히 한국성을 강조하지 않았지만, 충분히 한국적이었다. 섬세한 글로벌 향수 브랜드를 넉넉하게 품는 장소가 될 수 있었다.

#막문화#한국문화#대강정신#한국적공간설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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