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발과 레드힐’ 루이 14세… 佛패션 노동자, 제철업보다 26배 많아[양정무의 미술과 경제]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8월 31일 23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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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궁정 의복 관련 칙령 발표해… 궁중복-액세서리 프랑스산만 허용
수입 의존 레이스 등 국내생산 길 열어… 프랑스 산업 구조 ‘패션 중심’ 재편화
레드힐-가발 통해 군주적 존재감 과시… 유럽 전역 퍼지며 英-獨 왕궁에 영향
차별적 권위 드러낸 시각적 장치 활용

야생트 리고가 그린 프랑스 루이 14세의 공식 초상화. 루이 14세의 은빛 드레스와 붉은색 휘장 등은 프랑스산 실크로 제작됐다. 사진 출처 루브르 박물관
야생트 리고가 그린 프랑스 루이 14세의 공식 초상화. 루이 14세의 은빛 드레스와 붉은색 휘장 등은 프랑스산 실크로 제작됐다. 사진 출처 루브르 박물관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1661년 프랑스의 왕 루이 14세는 의복 관련 칙령을 발표한다. 핵심은 프랑스 궁정에서 국내산 의류와 액세서리만 착용해야 하고 최신 유행을 따르며 행사마다 알맞은 옷차림을 갖춰야 한다는 규정이었다. 또한 궁정인들에겐 매년 여름과 겨울 두 차례 의복을 교체토록 했다. 루이 14세의 법 집행 의지는 강력했다. 1687년 그는 아들 옷이 외국산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이를 공개적으로 불태워 버렸다. 야생트 리고(1659∼1743)가 1701년에 완성한 루이 14세의 공식 초상화를 보면 자국의 의류 산업을 육성하겠다는 그의 정책적 결정이 30여 년 후에 어떤 결과를 내었는지 잘 보여준다. 그림을 살펴보면 국왕이 입고 있는 의복과 장신구는 물론이고, 커튼 휘장과 카펫, 의자 등이 모두 프랑스 물품으로 가득 차 있다. 제일 먼저 눈길을 끄는 건 국왕의 목과 손목에 두른 화려한 레이스다.》

당시 최고의 사치품으로 꼽히던 레이스는 베네치아에서 주로 수입됐다. 하지만 루이 14세의 결단 이후 프랑스 장인들은 본격적으로 레이스 제작에 나섰다. 초상화에 보이는 것처럼 폭이 넓은 화려한 레이스는 프랑스 장인들이 오랜 시간 공들여 제작한 것이다.

화려한 파란색 모피 망토 안에 보이는 왕의 은빛 드레스와 화면을 가득 채운 붉은색 휘장도 프랑스에서 제작한 실크이다. 프랑스는 실크를 주로 밀라노에서 수입했지만, 루이 14세의 결정 이후 프랑스 리옹 지역에서 대량 생산하게 됐다. 기록에 따르면 리옹 지역의 베틀(비단을 짜는 기구) 수는 1660년 3296대에서 1720년 5067대로 증가했다. 그리고 왕의 뒤쪽에 자리한 위엄 있는 팔걸이의자와 함께 바닥에 깔린 고급 카펫은 루이 14세가 아낌없이 지원한 고블랭(Gobelins) 공방에서 제작한 것이다.

● 패션으로 왕의 권위와 위엄 드러낸 루이 14세


초상화 속 루이 14세 목에 둘러진 화려한 레이스를 확대한 것. 레이스는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주로 수입됐지만 루이 14세의 의복 칙령 발표 이후 프랑스에서 자체적으로 생산됐다. 사진 출처 루브르 박물관
루이 14세는 당시 여러 패션 아이템을 유행시켰다. 초상화 속 루이 14세가 쓴 가발은 유럽 전역에서 유행했다. 가발과 함께 그의 패션 아이템으로 떠오른 것은 붉은 굽의 구두, 이른바 ‘레드 힐’(talon rouge)이었다. 루이 14세가 키가 작아 하이힐을 신었다는 통설이 있으나, 기록에 따르면 그는 평균보다 작은 체구가 아니었다. 추정컨대 하이힐은 원래 기병들이 말을 다루기 위해 신던 실용적 신발에서 기원했다. 루이 14세는 여기에 붉은 굽과 화려한 장식을 더해 권위와 위엄을 드러내는 패션 아이템으로 변모시켰다. 발레리노 시절 단련된 다리를 자신 있게 드러내며 레드 힐을 착용한 그는 리본과 다이아몬드 장식이 달린 구두로 군주적 존재감을 한껏 과시했다.

루이 14세가 신은 레드 힐. 레드 힐은 유럽 전역에 퍼지며 유럽 궁정문화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사진 출처 루브르 박물관
레드 힐은 1673년에 프랑스 궁정에 공식 도입되면서 단순한 장식이 아닌 왕과 특정 귀족의 차별적 권위를 드러내는 기준이 된다. 입궐 자격이 있는 혈통 귀족만이 이 구두를 신을 수 있었다. 레드 힐은 신발을 더럽히지 않는 고귀한 신분의 상징이자 국가의 적을 발아래 짓밟을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표식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레드 힐은 프랑스 왕실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리고의 초상화 속 루이 14세가 과시하듯 드러내는 레드 힐은 이후 루이 15세와 16세의 공식 초상화에서도 등장한다. 굽의 높낮이는 살짝 달라지지만, 붉은 색채는 여전히 강렬히 강조됐다.

레드 힐은 베르사유를 넘어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루이 14세의 정적이었던 네덜란드의 빌럼 3세조차 이를 착용했고, 영국의 조지 2세, 3세, 4세 모두 대관식 초상화에 이 신발을 신고 있는 모습이 담겼다. 오스트리아나 독일, 18세기 포르투갈 궁정의 초상화에도 붉은 굽이 등장한다. 프랑스 혁명 이후 붉은 굽 구두는 귀족적 허영의 상징으로 조롱받기도 했지만, 상징성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영국의 경우 국왕의 시종들은 국회 개원식이나 중요 행사에서 여전히 붉은 굽 구두를 신는다. 결국 루이 14세가 도입한 레드 힐은 단순한 유행을 넘어 왕권의 과시와 차별적 권위를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장치이자 유럽 궁정문화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다.

● 패션 정치로 유럽 전역에 영향 끼친 루이 14세

루이 14세가 각인한 드레스 코드는 단순한 유행을 넘어 프랑스 사회 전체의 산업 구조에도 영향을 끼쳤다. 실제로 프랑스의 패션 산업은 이때부터 놀라운 성장을 이룬다. 루이 14세 시대에 파리에서 일하던 임금 노동자의 약 3분의 1이 패션 관련 산업에 종사했다고 전해진다. 1847년 통계에 따르면 프랑스에서 96만9863명의 노동자가 의류, 장신구, 신발, 레이스 등 패션 산업에 종사했다. 이는 당시 제철업 노동자 수가 3만8000명에 불과했던 것과 비교해 프랑스 경제에서 패션 산업의 비중이 일찍부터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궁정 귀족들은 왕의 명령에 따라 해마다 최소 두 차례, 여름옷과 겨울옷을 새로 맞추어야 했다. 베르사유에 상주하던 약 5000명의 귀족이 이를 이행했는데 궁정 예복 한 벌의 가격은 노동자의 6년 치 연봉에 해당하는 2000리브르에 달했다. 루이 14세는 화려하게 차려입은 귀족에게 더 큰 관심과 혜택을 줬다. 이 때문에 경제적 부담에도 불구하고 패션은 귀족들의 경쟁을 심화시키는 장치로 기능했다. 일부 연구자는 이를 통해 왕이 귀족들의 재산을 탕진시켜 이들의 권력을 약화시켰다고 해석한다. 하지만 루이 14세가 귀족들에게 높은 연금으로 충분한 보상을 줬다는 점에서 이보다는 그가 귀족들을 예술과 패션에 몰두하게 만들어 정치적 긴장을 예술적으로 해소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

루이 14세 시대의 패션은 단지 궁정 내부의 유행에 그치지 않았다. 유럽 전역의 궁정과 상류층이 파리의 동향을 주시했고, 각국 왕실은 프랑스에서 어떤 옷이 유행하는지 끊임없이 궁금해했다. 이 결과 등장한 것이 인형이었다. 폴란드 왕으로 즉위한 아우구스트는 파리에 거주하는 자신의 측근에게 프랑스 왕실의 복장에 대해 물으며 “단순한 드로잉만으로는 부족하니, 반드시 실제 인형에 옷을 입혀 보내 달라”고 요구했다. 영국 왕실 역시 매달 프랑스에서 유행하는 옷을 입은 인형을 수입해 최신 유행을 따르려 했다.

세계 첫 패션 잡지인 ‘메르퀴르 갈랑’의 1678년 1월호에 실린 삽화. 사진 출처 프랑스 국립도서관
세계 첫 패션 잡지인 ‘메르퀴르 갈랑’의 1678년 1월호에 실린 삽화. 사진 출처 프랑스 국립도서관
흥미롭게도 세계 최초의 패션 잡지가 바로 이때 파리에서 탄생했다. 1672년 창간된 ‘메르퀴르 갈랑(Mercure Galant)’은 단순히 유행을 소개하는 차원을 넘어 옷 제작소 및 판매소 등 구매 정보를 일일이 안내했다. 1678년 1월호에는 귀족 남녀가 옷 가게에서 쇼핑하는 삽화가 실렸다. 자세히 보면 천과 숄, 재킷, 바지, 가발 등에 번호가 매겨져 있는데 각 번호는 판매처와 연결돼 있다. 이는 곧 패션이 ‘정보’와 ‘유통’을 기반으로 산업화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72년간 프랑스를 통치한 루이 14세는 공(功)과 과(過)가 뚜렷한 군주로 평가받는다. 집권 말기에는 전쟁으로 지나치게 국력을 소모시켰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프랑스 하면 떠오르는 고급스러움과 화려함의 시작을 알린 주인공이란 점 역시 부정할 수 없다. 루이 14세는 전투적 군주이면서 동시에 프랑스를 넘어 유럽 전역에 패션의 패러다임을 형성한 문화적 군주였던 셈이다.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루이 14세#레드 힐#프랑스 패션#베르사유 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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