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윤 민음사 브랜드커뮤니케이션팀장“모든 것이 일순간, 난생처음으로, 준비도 없이 닥친 것이다. 마치 한 번도 리허설을 하지 않고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그런데 인생의 첫 번째 리허설이 인생 그 자체라면 인생에는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 문장은 오래도록 내 마음에 머물러 있다. 우리는 살아가며 수없이 많은 무대 위에 선다. 첫 면접장에 들어설 때, 예기치 못한 이별의 순간에, 낯선 연단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갈 때…. 그 순간마다 나는 대사를 잊은 배우처럼 어색하고 서툴렀다. 아무리 연습하고 다짐해도 실제의 무대는 늘 예상을 벗어나 있었다. 삶이란 애초에 리허설 없는 본공연임을 절감했다.
요즘의 세상도 마찬가지다. 팬데믹, 전쟁, 기후 재난 앞에서 인류는 철저히 초보자였다. 매뉴얼은 부실했고 경험은 없었으며 정답은 더더욱 없었다. 모두가 허둥지둥 무대에 올라 우왕좌왕했지만, 그 혼란의 시간들이 곧 역사가 됐고 우리의 일상과 언어를 바꿔 놓았다. 준비되지 않은 무대에서 흘린 땀과 눈물이 결국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냈다.
쿤데라는 인생을 ‘밑그림 없는 밑그림’이라고 표현한다. 완성작을 위한 초안이 아닌 그 자체로 이미 공연이자 동시에 끝이라는 역설이다. 그렇다면 삶의 의미는 완벽한 연기에 있지 않을 것이다. 삐끗한 동작, 서툰 대사, 떨리는 목소리까지 끌어안으며 순간에 진심으로 서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생의 의미일지 모른다.
돌이켜보면 후회하지 않는 순간은 언제나 그 ‘준비되지 않음’을 받아들였을 때였다. 어설프고 미숙했지만 그 진심이 오래 남았다. 그래서 쿤데라의 문장은 오늘도 내게 묻는다. 지금 당신 앞에 닥친 무대에서, 비록 리허설은 없지만, 당신은 어떻게 서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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