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중-러 정상, 권위주의 연대 ‘신냉전’ 과시
김정은, 다자외교 무대 데뷔로 새 위상 노려
신냉전 구조 속 갈림길에 선 한국 외교
단기 대응 넘어 다층적·장기 전략이 관건
김정 북한대학원대 교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3일 중국 전승절 80주년 열병식 참관을 위해 톈안먼(天安門) 망루에 섰다. 그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사이에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세계 언론은 이 장면을 “권위주의의 퍼레이드”라고 불렀고, 일부는 “신(新)냉전의 개막식”이라고 규정했다. 중국은 전승절 80주년 기념식을 단순한 역사 행사가 아닌 국제 정치의 흐름을 바꾸는 전환점으로 만들었다. 유라시아 심장 지대를 관통하는 세 국가의 정상들은 국제 질서의 균열을 드러내며 지역 안정의 기초를 흔드는 상징적 장면을 연출해 냈다.
김 위원장은 이번 회동에서 새로운 위상을 드러냈다. 그는 집권 이후 국제사회에서 제재와 압박, 비난 속에 철저히 고립된 지도자로 남았다. 국제 무대에서 북한은 늘 주변 국가로 취급받았다. 톈안먼 망루에서 김 위원장은 상황을 반전시켰다. 그는 자신이 속할 ‘블록’을 찾았고, 그 중심에서 ‘리더’의 자리를 차지했다. 김 위원장은 북한을 피곤한 ‘불량국가’에서 국제 질서를 흔드는 ‘전략국가’로 격상시켰음을 행동으로 천명했다.
북-중-러는 각자의 필요 때문에 결속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이어가기 위해 무기와 군수 보급을 확보해야 했다. 중국은 미국과 서방의 포위망을 흔들 전략적 카드를 절실히 찾았다. 북한은 체제 생존과 안보 보장, 사실상의 핵보유국 인정을 갈망했다. 서로의 필요가 맞아떨어지자 세 정상은 단순한 이해관계를 넘어 전략적 연대를 형성했다. 냉전 시절에도 이들은 협력했으나 상호 불신이 깊었다. 지금의 연대는 훨씬 계산적이고 전략적이며 무엇보다 공개적이다.
일부 평론가는 이번 회동에 대해 오월동주(吳越同舟·적대적인 세력이 서로 협력함) 식의 잠정 동행이라고 평가절하한다. 이런 해석은 위협의 본질을 놓친다. 북-중-러는 단순한 반미 연대라고 보기 어렵다. 그들은 미국 중심 국제질서에 구조적으로 도전하며 새로운 규칙을 세우겠다고 선언한다. 이들은 국제 규범을 무시하거나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자국 이익을 절대화하며 필요하면 무력 사용도 정당화한다. ‘트러블메이커’의 정치적 유전자를 공유한 이들이 손을 잡으면 협력은 ‘권위주의 블록’으로 진화한다.
냉전은 과거의 기억으로 머물지 않는다. 북-중-러 세 정상은 새로운 냉전을 현재 진행형으로 재정의하며 손을 맞잡았다. 핵을 가진 독재자, 전쟁 중인 제국의 황제, 권위주의의 맹주는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겠다”는 선언을 행동으로 옮겼다. 정치 체제는 달라도 전략적 이해는 일치했고, 군사·경제·외교 전반에서 공조는 빠르게 확대됐다. 이번 망루의 장면은 단순한 기념식이 아닌 새로운 시대의 서막이었다.
여기서 한국은 더 큰 과제를 떠안는다. 한국은 지정학적 갈림길에 섰다. 단순히 한미일 협력을 강화한다고 이 권위주의 블록에 맞서기 어렵다. 북-중-러의 결속이 구조적 도전인 만큼 한국은 대응 전략을 ‘즉각적 압박’이나 ‘상징적 외교’에 한정하지 말고 장기적 시야를 가진 전략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보여주기식 군사 억지나 이벤트성 회담만으로는 위기를 돌파하기 어렵다.
한국은 미국과의 동맹을 유지하면서도 중국과 러시아를 동시에 관리할 유연한 외교를 구사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북한 문제도 단순한 적대 프레임을 넘어 다층적 전략 속에서 다뤄야 한다. 한국이 ‘페이스메이커’로서 동북아 안정을 주도할지, 아니면 권위주의 블록의 ‘트러블메이커’에게 외교적으로 농락당할지는 우리의 정책 선택에 달려 있다. 정책 선택을 미루면 한국은 주도권을 잃고 외교적 공간을 스스로 포기하게 된다.
‘신냉전’이란 용어는 여전히 논쟁적이다. 다만 선언이 없다고 해서 현실이 사라지지 않는다. 과거 냉전도 명확한 선언 없이 시작됐다. 이념보다 이해가 먼저 움직였고, 전략이 무력보다 앞섰으며 군비 경쟁은 뒤를 따랐다. 오늘의 상황은 그 초입과 놀라울 만큼 닮았다. 지금은 글로벌 경제의 상호 의존성이 높고, 정보와 기술의 확산 속도가 과거보다 훨씬 빠르다. 갈등이 격화하면 파급력은 과거보다 더 크고, 속도는 즉각적으로 나타난다. 한국은 이 변화의 한복판에서 단순한 방관자가 아니라 능동적 행위자가 되어야 한다.
한국은 중요한 장면을 목격했다. 김 위원장이 시 주석과 푸틴 대통령 사이에 선 톈안먼 망루의 장면은 단순한 사진이 아니다. 세 정상의 모습은 국제 질서 변화를 알리는 행동의 신호였다. 그 사진 한 장은 21세기 국제정치사의 전환점을 상징하는 서막으로 기록될 것이다. 한국의 외교적 선택은 바로 그 역사의 한복판에서 이루어진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