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이 11일 “관세를 내든지, 아니면 합의를 받아들이든지 양자택일(black or white)하라”며 한국을 압박했다. 3500억 달러(약 486조 원) 대미 투자를 미국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행한다는 내용의 계약서에 사인하지 않으면, 양국이 7월 30일 합의한 상호·품목 관세율 15%를 4월 초 미국이 일방적으로 정한 25%로 되돌려 부과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투자 규모에 동의했을 뿐, 이행 방법까지 합의한 건 아니라고 보는 우리 정부는 “합리성, 공정성을 벗어난 협상은 하지 않을 것”이라며 단호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러트닉 장관은 “한국은 이재명 대통령이 (워싱턴에) 왔을 때 서명하지 않았다. 일본은 계약서에 서명했다”고 했다. 최근 일본 정부가 5500억 달러(약 764조 원) 대미 투자 패키지에 합의한 것처럼 한국도 빨리 사인하란 요구다. 일본은 미 정부와 트럼프 대통령이 투자 대상과 액수를 지정하면 45일 안에 자금을 대고, 투자금을 회수할 때까지는 5 대 5, 이후 미국 9 대 일본 1의 비율로 수익을 나누는 협상에 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제 규모 등에 차이가 큰 만큼 일본과 같은 투자 방식은 수용할 수 없다는 게 우리 정부의 판단이다. 일본 국내총생산(GDP)은 한국의 2배가 넘고, 외환보유액은 일본이 1조3242억 달러로 4163억 달러인 한국의 3.2배다. 일본은 최악의 상황에선 엔화를 찍어 대외 채무를 갚을 수 있는 준(準)기축통화국이고, ‘달러 마이너스통장’으로 불리는 통화스와프를 미국과 맺은 나라라는 점도 한국과 다르다. 게다가 트럼프 정부가 임기 내 투자를 요구하는 3500억 달러는 한국 외환보유액의 84%에 해당하는 수준의 금액이다. 투자 기간을 충분히 늘려 잡고, 방식도 직접투자가 아닌 대출·보증 중심으로 바꾸지 않으면 심각한 외화 유동성 문제까지 초래될 가능성이 있다.
이 대통령은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국익에 반하는 결정은 절대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지만 한미 협상의 교착상태가 장기화할 경우 일본보다 10%포인트 높은 대미 관세 때문에 우리 수출기업들이 심각한 피해를 보게 된다는 게 딜레마다. 지금은 우리가 처한 어려움을 분명히 전달해 한국을 ‘머니 머신’ 취급하는 미국을 설득하는 게 급선무다. 향후 계속될 막바지 협상에서 정부와 민간의 역량을 총동원해 돌이킬 수 없는 국익 훼손을 막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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