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는 과학기술이 곧 국력이다. 인공지능(AI), 양자, 바이오, 우주과학과 같은 첨단 분야의 성패가 외교·경제·안보의 향방을 결정짓는다. 과학기술은 더 이상 연구실의 성취에 머무르지 않는다. 국가의 생존과 번영을 좌우하는 전략 자산이자, 외교의 새로운 영역이다. 이런 점에서 스웨덴의 ‘과학외교’는 한국이 반드시 주목해야 할 모델이다.
인구 1050만 명에 불과한 스웨덴이 어떻게 세계 과학기술의 중심이 됐을까. 지난달 최종현학술원 주관으로 찾은 수도 스톡홀름에서 그 비밀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답은 명확했다. 과학이 국가경쟁력과 외교 자산으로 일찍부터 자리매김했다는 점이다.
스웨덴의 과학 거점은 ‘스톡홀름 트리오’(KTH 왕립공대·카롤린스카 연구소·스톡홀름대)와 웁살라대다. 이들은 기초과학에서 첨단 응용연구까지 전 영역에서 세계적 성과를 내고 있다. 특히 카롤린스카 연구소는 노벨 생리·의학상 선정 기관으로 글로벌 지식네트워크의 심장부다. 매년 전 세계 과학자와 정책결정자를 불러 모으며 스웨덴을 곧 ‘과학외교의 무대’로 만든다.
그러나 스웨덴의 힘은 학문적 권위만이 아니다. 전략연구재단(SSF), 스웨덴연구소(RISE), 생명과학실험실(SciLifeLab) 같은 기관들은 기초과학과 산업혁신을 긴밀히 잇는다. 연구자의 아이디어가 기업의 창의성과 결합해 산업경쟁력으로 발전하고, 이는 다시 글로벌 네트워크를 통한 외교 자산으로 이어진다. 한국에서도 흔히 산학연 협력을 말하지만, 스웨덴은 이를 실질적 정책과 제도로 뒷받침해 성과를 만들어냈다.
한국은 세계 8강 과학기술 강국이다. 이에 걸맞게 과학외교 전략을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AI, 반도체, 바이오, 에너지 등에서 이미 세계적 경쟁력을 갖췄음에도 그 성과를 외교 자산으로 활용하는 전략은 여전히 부족하다. 상징적인 사례가 있다. 카롤린스카 연구소 관계자로부터 곧 아시아를 방문한다는 말을 듣고 방한 여부를 물었더니, 중국과 일본만 일정에 포함돼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세계적 수준의 과학 역량을 갖췄지만, 외부의 시각에서는 한국이 여전히 충분히 보이지 않는다.
한국이 취해야 할 과제는 분명하다. 첫째, 국제무대에서 활약할 ‘과학자 외교관’을 체계적으로 육성해야 한다. 학문적 연구를 넘어 글로벌 거버넌스와 국제회의에서 한국의 전략을 설득력 있게 전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대학과 연구소를 글로벌 협력의 거점으로 삼아야 한다. 우리의 우수한 대학과 연구기관들이 스톡홀름 트리오처럼 과학외교의 플랫폼으로 기능하도록 지원해야 한다. 셋째, 한국의 강점 분야를 유럽과의 협력 네트워크에 접목해야 한다. 한국은 올해부터 세계 최대 규모의 연구혁신 프로그램인 ‘허라이즌 유럽’의 준회원으로 참여한다. AI·반도체의 응용 분야를 스웨덴의 기초과학과 연결하고, 바이오·에너지 연구를 유럽 공동체 프로그램과 연계한다면 더 큰 시너지를 낼 수 있다.
연구는 과학자의 몫이다. 그러나 그들의 성취가 정당한 평가를 받고, 국제사회에서 합당한 대우를 받도록 하는 일은 과학외교의 책무이자 국가의 책임이다. 스웨덴이 보여준 길을 벤치마킹해 과학외교를 통한 기술주권과 글로벌협력을 추진할 때, 우리는 ‘작지만 강한 나라’를 넘어 ‘과학으로 세계를 선도하는 나라’로 도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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