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은 계절의 문턱에 선 달이다. 여름의 열기가 가라앉고 들판은 황금빛으로 물든다. 유럽 농경사회에서 9월은 수확의 달이었다. 네덜란드 화가 피터르 브뤼헐의 ‘수확하는 사람들’(1565년·사진)은 바로 이 계절의 풍경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 그림은 원래 안트베르펜의 상인이자 미술품 수집가였던 니콜라스 용헬링크가 자신의 별장을 위해 의뢰한 것으로, 사계절을 묘사한 6부작 연작 중 하나다. 그림 속 농부들은 땀 흘리며 곡식을 베고, 무거운 이삭을 나르고, 나무 그늘 아래 모여 빵과 음식을 나누고 있다. 한 남자는 아예 드러누워 낮잠을 즐긴다. 노동과 휴식, 생산과 소비가 한 화면 안에 공존하는 장면이다.
르네상스 시대 화가들이 신화나 성경 속 이야기를 즐겨 다룰 때 브뤼헐은 평범한 농민들의 일상에 주목했다. 그는 영웅적 사건이 아니라 자신과 동시대를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삶을 예술의 주제로 끌어올렸다. 세심하게 관찰한 자연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되 인물들을 이상화하거나 미화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단순한 풍속화가 아니라 사회적 기록이자 시대의 초상으로 평가된다.
브뤼헐은 시대를 기록하는 방식에서도 독창적이었다. 그림 속 풍경은 특정 지형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 아니라 여러 풍경을 상상으로 조합한 것이다. 높은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을 택해 가까운 밭에서 일하는 농부부터 멀리 펼쳐진 마을과 산맥까지 한눈에 담았다. 이 독창적인 원근법은 현실의 눈이 아니라 조망하는 눈, 즉 역사의 흐름과 공동체의 삶 전체를 바라보는 시선을 제공한다.
수확의 계절은 해마다 돌아온다. 브뤼헐의 그림은 풍요가 단지 곡식의 문제가 아니라, 함께 일하고 함께 나누는 공동체적 삶의 산물임을 상기시킨다. 결실은 혼자의 것이 아니라 모두의 것이며 함께 나눌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는 메시지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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