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이라도 보고 와야겠어[박연준의 토요일은 시가 좋아]〈8〉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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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두려움이 토끼처럼 뛰어다니는 얼굴

눈길이 너무 멀리 가버려 눈빛을 가질 수 없는

얼굴, 걱정밖에 안 남은 얼굴,

천근만근 무거운 얼굴, 모가지가 두 개는 되어야

겨우 버틸 수 있는 얼굴, 타인에게도

슬픔이 있다는 것을 다 잊어버린

얼굴, 기억하던 그 얼굴은 간데없고

기억해주길 바라는 어리광이 서린 얼굴

침대에 나뒹구는 얼굴, 솜으로 채워진 얼굴, 얼굴을 베고 잠든 베개,

자그마한 구명보트가 이마에 정박해 있는

(중략)

얼굴을 갖다 대고 귀를 기울이면

더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숨을 뱉는

맹세를 놓아줌으로써

평생 동안 꾸던 꿈에서 비로소 깨어나 잠시 웃는

얼굴, 완벽한 잠으로 접어드는 얼굴

―김소연(1967∼ )


이 시는 누군가를 배웅하는 시다. 안녕을 고하기 전 ‘그 얼굴’ 위를 서성이고 더듬다 미리 그리워하는 시다. 누군가 죽는다는 건 얼굴을 다시 볼 수 없다는 말이다. 친밀했던 얼굴이 어떻게 사라질 수 있을까?

떠나는 중인 얼굴은 침상에 누워 있는 얼굴이다. “두려움이 토끼처럼 뛰어다니는” 얼굴, “눈길이 너무 멀리 가버려 눈빛을 가질 수 없는” 얼굴, “자그마한 구명보트가 이마에 정박해 있는” 얼굴이다. 화자는 떠나는 중인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딱 한 번 갖다 댄다. 귀를 가까이하고 말을 기다린다. 그러나 말 대신 “숨을 뱉는/맹세를 놓아줌으로써” 그는 완벽한 잠으로 접어든다.

얼굴이란 말은 얼마나 예쁜지.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 온종일 쓰다듬고 싶은 말이다. 이 시엔 제목을 포함해 얼굴이란 단어가 총 스물다섯 번 나온다. 한 번 낭독하는 것만으로 누군가의 얼굴에 내 얼굴을 극진히 대어 본 기분이 든다.

#김소연 시인#얼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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