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강 재벌의 ‘부’와 아트 딜러의 ‘안목’이 함께 빚어낸 품격의 미술관[양정무의 미술과 경제]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9월 21일 2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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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경제의 성지 ‘프릭 컬렉션’

미국 뉴욕의 대표 미술관 중 하나인 ‘프릭 컬렉션’. 철강 재벌 헨리 클레이 프릭이 살던 저택으로, 그의 사후 1500여 점의 소장 작품을 선보이기 위해 미술관으로 재탄생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프릭 컬렉션
미국 뉴욕의 대표 미술관 중 하나인 ‘프릭 컬렉션’. 철강 재벌 헨리 클레이 프릭이 살던 저택으로, 그의 사후 1500여 점의 소장 작품을 선보이기 위해 미술관으로 재탄생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프릭 컬렉션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미국 뉴욕의 예술적 고급스러움을 제대로 느끼려면 반드시 들러야 할 곳이 있다. 바로 ‘프릭 컬렉션’이다. 5번가 70스트리트에 위치한 이 미술관은 티치아노, 벨라스케스, 렘브란트의 명작이 즐비한 보석 같은 곳이다. 특히 일명 ‘프라고나르의 방’이야말로 예술의 성지이자 경제의 성지라고 부를 만한 곳이다. 바로 이 방에서 이른바 ‘도금 시대’라 부르는 미 경제의 초호황기를 이끈 ‘금융왕’ 존 피어폰트 모건(1837∼1913)과 철강 재벌 헨리 클레이 프릭(18491919)의 미적 취향을 한꺼번에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 로코코 화가 장오노레 프라고나르의 ‘사랑의 단계’ 4연작 중 ‘만남(The Meeting·1771∼1772)’.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프릭 컬렉션
프랑스 로코코 화가 장오노레 프라고나르의 ‘사랑의 단계’ 4연작 중 ‘만남(The Meeting·1771∼1772)’.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프릭 컬렉션
18세기 프랑스 귀족의 방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이 공간은 프랑스 로코코 화가 장오노레 프라고나르(1732∼1806)의 ‘사랑의 단계’ 4연작을 중심으로 꾸며졌다. 원래 프라고나르의 그림들은 1771년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의 애첩 뒤바리 부인을 위해 제작됐다. 1899년 모건이 이를 30만 달러에 사들여 그의 영국 런던 저택을 장식했다. 모건이 사망한 후 이 그림들은 프릭에게 넘어가 지금처럼 전시되고 있다. 이렇게 프라고나르의 그림들이 두 재벌 모건과 프릭 모두를 사로잡았다니 눈길이 더 많이 갈 수밖에 없다.

빛과 그림자 함께 지닌 헨리 프릭

제럴드 켈리의 ‘헨리 프릭의 초상화’(1925). 
사진 출처 프릭 피츠버그 박물관
제럴드 켈리의 ‘헨리 프릭의 초상화’(1925). 사진 출처 프릭 피츠버그 박물관
여기서 ‘프릭 컬렉션’을 세운 프릭이 어떤 사람인지 잠시 살펴보자. 그는 1849년 미 펜실베이니아의 한적한 시골에서 태어났는데, 철강 산업에 필요한 석탄 공급을 독점하면서 큰돈을 벌었다. 남북전쟁 후 미 대륙 전역에 철도가 놓이면서 철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자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와 손잡고 미국의 철강 산업을 일으켜 부를 쌓게 된다.

탁월한 기업인처럼 보이지만 프릭의 성공 이면에는 잔인한 노조 탄압이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 그는 노조에 가입한 탄광 노동자를 내쫓았고, 이로 인해 발생한 1892년 홈스테드 파업을 사설 용역을 동원해 잔인하게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10명이 숨지고 60명이 크게 다쳤다. 이 일을 계기로 그 자신도 테러를 당해 총상을 입었지만 결국 살아났다. 그야말로 19세기 말 미 고도 경제성장의 영광과 어둠을 한 몸으로 겪은 기업인이다.

어쨌든 프릭이 1901년 카네기 철강회사의 지분을 정리하면서 받은 돈은 3000만 달러였다. 그는 이 막대한 돈으로 뉴욕 한복판에 자신의 저택을 지었다. 한 블록 전체를 매입하는 데 200만 달러를 썼고, 여기에 300만 달러를 들여 르네상스식 건축물을 올렸다. 오늘날 화폐 가치로 대략 1억5000만 달러(약 2000억 원)를 총건축비로 투입한 것이다.

프릭의 저택을 장식할 그림에 투여된 돈에 비하면 건축비는 상대적으로 미미해 보인다. 그는 응접실 공간을 꾸미기 위해 모건이 소장했던 프라고나르의 연작을 구매했는데, 이때 그가 지불한 돈이 125만 달러였다. 부지 매입비가 200만 달러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상당한 액수다. 이 외에 그가 소장한 1500여 점의 작품 가치는 총건축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높았다.

‘도금 시대’ 대저택이 미술관으로

프릭이 이처럼 정성을 다해 짓고, 값비싼 미술품으로 꾸민 그의 대저택이 바로 오늘날 프릭 컬렉션이다. 그는 1919년 생을 마감하며 자신의 뉴욕 저택과 자신이 모은 미술품을 사회에 되돌려주겠다고 선언했다. 단순히 공간과 작품만 내놓은 것이 아니라 미술관을 운영할 수 있는 기금으로 1500만 달러도 기부했다. 결국 이 같은 그의 유언에 따라 그의 부인이 사망한 후 1935년부터 그의 저택은 프릭 컬렉션이라는 이름으로 대중에게 공개됐다.

프릭 컬렉션 내 ‘프라고나르의 방’.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프릭 컬렉션
프릭 컬렉션 내 ‘프라고나르의 방’.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프릭 컬렉션
오늘날 프릭 컬렉션 내 프라고나르의 방은 1916년 저택이 완성됐을 때의 모습과 거의 동일하다. 프라고나르의 사랑 연작뿐만 아니라 의자나 탁자 같은 가구, 거기에 놓인 조각과 도자기 모두 처음 프릭이 연출한 모습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그러니 이 방에 들어가는 것은 미국식 자본주의가 남긴 빛나는 순간을 마주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통 경제 호황기를 ‘황금시대(Golden Age)’라고 부르는데, 미 경제가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른 시기는 이와 달리 도금 시대, 즉 ‘길디드 에이지(Gilded Age)’라고 부른다. 길디드라는 용어는 금박이 입혀져 있다는 뜻으로, 미국의 부가 겉만 번지르르하지만 속은 비어 있는 벼락부자라는 조롱의 의미가 담겨 있다.

사실 이 시기 미 경제를 이끌었던 경제인을 부를 때 쓰이는 말도 무시무시하다. 바로 ‘로버 배런(Robber Baron)’, 즉 강도 귀족이 그것이다. 프릭뿐만 아니라 모건, 록펠러, 카네기 같은 금융인과 기업인을 부를 때 이 타이틀이 자주 따라붙는다. 이들이 독점을 통해 경쟁 기업을 제압하고, 노조를 짓밟으며 부도덕하게 부를 모았다는 점을 비판하기 위한 용어다. 그럼에도 ‘강도 같은 귀족’이 주는 어감만큼은 정말 살벌하다.

그런데 프릭 컬렉션을 방문해 특히 프라고나르의 방에 들어가 보면 ‘길디드 에이지’나 ‘로버 배런’이라는 용어가 정확한 표현인지 의문을 품게 된다. 너무나 고상하고, 너무나 고급스러워서 감탄을 연발할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벼락부자나 강도 귀족으로는 도저히 낼 수 없는 품위가 넘쳐난다. 유럽의 어느 명문가의 저택도 이보다 더 우아할 수 없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곳인데, 사실 여기에는 숨겨진 비밀이 있다. 프라고나르의 방이나 프릭 컬렉션의 건축과 내부 인테리어, 미술품 구매는 상당 부분 프릭이 영국의 아트 딜러 조지프 듀빈(1869∼1939)의 조언을 받아들인 결과이기 때문이다.

아트 딜러 만나 예술적 결실 완성

듀빈은 유럽의 예술품과 미국의 자본을 연결한 전설적 아트 딜러다. 그는 단순히 작품을 중개하는 상인이 아니었다. 미국의 신흥 재벌들에게 미술 멘토이자 컬렉션 조언자였다. 그는 “유럽에는 예술품이 넘쳐나고, 미국에는 돈이 넘쳐난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양쪽을 연결하는 데 비즈니스 감각을 발휘했다. 그는 프릭뿐만 아니라 모건, 록펠러 2세, 헌팅턴 등 도금 시대를 대표하는 거부들의 컬렉션을 사실상 독점 관리했다.

결과적으로 듀빈의 안목은 미국의 미술 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유럽을 대표하는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의 명작 상당수가 그의 손을 거쳐 대서양을 건넜다. 오늘날 프릭 컬렉션뿐만 아니라 미국의 주요 미술관들이 유럽의 명품으로 가득 차 있는 배경에는 그가 신대륙 미국에서 유럽의 미술품 판매 활동을 역동적으로 벌인 결과가 자리하고 있다.

한편 미 신흥 재벌들은 듀빈이 선별한 미술품을 소장하면서 또 다른 정체성을 얻게 됐다. 벼락부자나 강도 귀족으로 불리던 악명 대신 ‘미술 컬렉터’나 ‘문화 후원자’라는 고상한 타이틀이 더 자주 따라붙기 때문이다. 결국 미술품 덕분에 이들의 평가는 악덕 기업가에서 문화예술 후원인으로 변신했다.

실제로 오늘날 프릭이라는 인물을 브리태니커 사전에 검색해 보면 그의 이름 뒤로 세 개의 용어가 순차적으로 나온다. 기업인, 미술 컬렉터, 자선가가 그것이다. 이제 그는 기업으로 돈을 벌어 미술품을 모아 그것을 사회에 아낌없이 환원한 자애로운 인물로 기억된다.

‘부자가 헛돈 쓰는 일은 없다’는 말처럼, 프릭이나 동시대 미국의 성공한 기업인들이 미술품에 쏟아부은 막대한 돈은 처음엔 과시적 소비로 조롱받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이들의 삶을 새롭게 비추는 명예로운 등대가 되고 있다. 프릭 컬렉션 내 프라고나르의 방은 이 같은 변화의 생생한 증거이다. 프라고나르의 방은 프릭이라는 자산가의 엄청난 돈과 듀빈이라는 아트 딜러의 탁월한 안목이 빚어낸 독특한 예술적 결실로, 시간이 갈수록 더 빛나게 될 것이다.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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