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골국물 깊은 풍미 입힌 속 꽉 찬 전통순대의 기품[김도언의 너희가 노포를 아느냐]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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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구 인현동 을지로 인쇄골목에 있는 ‘산수갑산’의 순대정식. 김도언 소설가 제공
서울 중구 인현동 을지로 인쇄골목에 있는 ‘산수갑산’의 순대정식. 김도언 소설가 제공
김도언 소설가
김도언 소설가
공업소와 인쇄소가 빽빽이 들어선 서울 중구 인현동 을지로의 한구석. 낡은 간판과 어두운 골목은 구도심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이곳에 명품 순대를 파는 집이 있다. 오래된 골목에 새 활력을 불어넣는 공간, ‘산수갑산’이다. 맛집으로 입소문이 나 주말에는 손님들로 긴 줄이 늘어선다. 한 일본인 친구가 말한 한국인의 특징이 떠오른다. 그는 “한국인은 맛에 진심이다. 한국 사람들은 맛집을 찾아 삼만 리라도 갈 것 같다”고 평가했다. 그 말처럼 사람들은 이 집 순대를 먹기 위해 먼 길도 마다하지 않는다.

순대가 맛있어 봐야 얼마나 다르겠나 싶지만, 이 집 순대는 확실히 특별하다. 대표 메뉴인 순대모둠(2만8000원)은 비주얼부터 압도적이다. 순대와 오소리감투, 머릿고기, 간 같은 익숙한 구성에 새끼보와 돈설이 더해져 풍성함을 더한다. 순대 자체도 남다르다. 두툼해서 씹는 맛이 일품이다. 속은 찹쌀, 선지, 채소를 꽉 채워 사골 국물에 삶아내 깊은 풍미를 낸다. 이른바 이북식 아바이순대를 재현한 셈이다. 대창의 질긴 정도, 선지의 향, 찹쌀과 채소의 감칠맛이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왜 사람들이 이 집 순대를 ‘명품’이라 부르는지 알 수 있다.

남쪽에서 흔히 먹는 당면 위주의 개량 순대와는 격이 다르다. 정통 순대의 기품이라고 할까. 물론 순대 취향은 세대와 입맛에 따라 갈린다. 정통식이냐, 당면식이냐는 어느새 ‘짜장 vs 짬뽕’, ‘물냉 vs 비냉’처럼 호각을 이루는 대항 구도로 자리 잡았다.

이 집이 식객들을 매혹시킨 상차림을 좀 더 설명하자면 순대모둠에 함께 나온 간부터 압권이다. 얼마나 삶았는지 입에 넣으면 부드러워 사르르 녹는다. 과장하자면 ‘간맛 쿠키’ 같다. 도대체 몇 번의 연습 끝에 이런 맛을 찾아냈을까 싶다. 테이블마다 석박지가 담긴 단지가 놓여 있고, 기본 찬으로 청양고추, 마늘과 마늘종 무침, 김치가 깔린다. 순대 위에 마늘이나 마늘종 무침을 올리면 특유의 고소한 군내에 알알한 맛이 겹쳐진다. 한 점 한 점이 자꾸 손을 부른다.

결국 필자는 계획을 바꿨다. 이 맛에 혹해 술을 시키고 말았다.

노포에는 공통점이 있다. 신선한 재료를 쓰고, 진심으로 장사하며 손님을 가족처럼 대한다는 점이다. 이 집도 예외가 아니다. 순대는 재료의 소진 주기를 짧게 운영할 수밖에 없다. 개인이 운영하는 업장이 대형 프랜차이즈와 맞서려면 더더욱 그렇다. 손님 누구도 냉장고에 오래 묵은 재료로 만든 음식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산수갑산은 ‘당일 재료는 반드시 당일 소진한다’는 원칙을 지킨다. 그에 값할 만큼 손님이 몰리고 있으니 노포로서는 이보다 행복한 경우는 없을 것이다.

이 집 이름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삼수갑산은 함경남도 삼수군과 갑산군을 가리킨다. 지형이 험해 사람의 발길이 닿기 어려운 오지라는 뜻으로 조선 시대부터 쓰인 표현이다.

이 집은 그것을 ‘산수갑산’으로 비틀었다. 이북식 순대를 계승한다는 명분과 함께 자기만의 오리지널리티를 확보한 셈이다. 동시에 브랜드의 미학적 품격까지 담아냈다. 누구나 쉽게 닿을 수 있는 서울 도심, 을지로에 산수갑산이 있다. 오지가 아니라 도시인의 가까운 쉼터가 된 노포다. 아니, 다 떠나서 순대라는데 더 무슨 말이 필요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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