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싱크홀 사고로 부인 잃은 80대 운전자에게 致死 혐의라니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9월 25일 23시 24분


코멘트
지난해 8월 29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에서 발생한 싱크홀에 차량이 빠져 있다. 이 사고로 80대 운전자는 중상을 입었고 조수석에 탔던 70대 아내는 숨졌다. 뉴스1
경찰이 대형 ‘땅 꺼짐(싱크홀)’ 사고로 부인이 숨지고 자신은 중상을 입은 80대 운전자에 대해 전방 주시 소홀의 책임을 물어 올 2월 검찰에 송치했다고 한다. 사고 당시 운전자였던 남편이 싱크홀을 신속히 피하지 못해 동승했던 부인이 사망했다며 그에게 교통사고처리특례법상 치사(致死) 혐의를 적용했다. 검찰이 기소유예로 처리하긴 했지만 부인을 잃고 간신히 목숨을 건진 노인이 졸지에 범죄자로 처벌받게 될 뻔했던 것이다.

이 사고는 지난해 8월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왕복 8차로 도로에서 벌어졌다. 대낮에 도로 한복판이 폭삭 꺼지면서 노부부의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이 가로 6m, 세로 4m 크기의 거대한 싱크홀로 빨려 들어갔다. 주변 차량 블랙박스에 찍힌 영상을 보면 사고 차량은 갑자기 뒤뚱하더니 순식간에 땅속으로 고꾸라졌다. 아무리 전방 주시를 잘해도 코앞에서 땅이 꺼지는데 이를 침착하게 피해 갈 수 있는 운전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경찰은 한국도로교통공단으로부터 운전자의 사고 회피 가능성이 있었다는 의견을 받은 데다 동승자가 사망해 검찰에 송치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고 경위와 운전자의 상황을 충분히 고려했는지 의문이다. 당시 남편은 부인의 무릎 치료를 위해 병원으로 데려가던 길에 날벼락 같은 사고를 당했다. 본인도 중상을 입은 데다 부인의 사망으로 누구보다 참담해할 사람이 남편일 것이다. 최근 회사 냉장고에서 초코파이 등 1050원어치 간식을 꺼내 먹은 경비원을 검경이 절도 혐의로 재판에 넘기고, 1심 법원이 50배의 벌금을 물라고 판결해 논란이 일었다. 우리 사법 시스템이 기계적인 법 적용에 매몰돼 상식의 눈높이를 잃어버린 결과가 이런 일들로 나타났을 것이다.

이 사건은 관계 당국이 싱크홀 사고를 잘 예방했더라면 피할 수 있었던 비극이다. 사고 현장 인근에선 빗물 펌프장 공사가 진행돼 지반 침하 우려가 있었고, 사고 직전엔 구의원이 해당 도로를 지나는 차량이 연거푸 튀어 오르는 걸 보고 구청에 신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도로 관리 책임자들은 모두 무혐의로 종결됐다. 검찰에 송치된 사람은 싱크홀 사고 피해자인 남편이 유일했다. 법 적용이 상식과 멀어지면 공정함 또한 잃어버리게 마련이다.


#싱크홀#치사 혐의#범죄자#80대 운전자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