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유럽의 수녀원장 헤라드 폰 란츠베르그가 집필한 ‘기쁨의 동산’에 실린 ‘지옥’ 삽화. 죄를 지은 영혼들이 불길과 괴물에게 시달리는 모습을 단계별로 묘사했다.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강용수 고려대 철학연구소 연구원‘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은 젊을 때 겪는 시련이 훗날 값진 자산이 된다는 뜻이다. 석가모니는 생로병사의 여정에서 세상 모든 것이 고통(一切皆苦·일체개고)임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고통이 전혀 없는 삶이 과연 진정한 행복일까. 불편과 시련을 피하려는 태도가 오히려 삶의 깊이를 앗아가는 것은 아닐까.
종교는 인간의 고뇌를 해소하기 위해 나름의 해법을 제시해 왔다. 많은 종교 교리의 핵심에 사후 세계, 특히 형벌의 장소인 지옥이 실제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논란이 있다. 유신론의 관점에서 보면 전지(全知)·전능(全能)·전선(全善)한 신이 지옥을 만든다는 것은 그 본성에 모순된다. 논리적으로 자비로운 신이 영원한 복수를 설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종교철학은 이 지점을 문제 삼는다. 만약 신이 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창조했다면 스스로 선과 악의 속성을 함께 지닌 존재가 되어 논리적 모순에 빠진다는 이유에서다. 그래서 “지옥은 없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러나 필요악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훈계하고 질책하듯, 삶의 고통은 사랑의 매와 같다. 우리가 겪는 고통은 자신의 본성과 신의 섭리를 깨닫기 위해 필요한 경험일 뿐 인간을 죽이기 위한 게 아니다. 따라서 신이 주는 벌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 안에서 이뤄진다고 본다.
흔히 ‘대운이 오기 전엔 최악을 겪는 일이 많다’고들 한다.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바닥을 확인하면 이제는 올라갈 일만 남았다는 이유일테다. 평생 병약했던 철학자 니체의 가장 유명한 명언 중 하나가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욱 강하게 한다”는 것이다. 고통은 바이러스처럼 어디에나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바이러스 없는 공간을 찾으려 애쓰기보다 병균을 견딜 수 있는 면역력을 키우는 일이다.
세상에 고통 없는 곳은 없다. 신체적이든 정신적이든 고통이 우리를 죽음 같은 절망으로 몰아넣을 때 상황을 피하지 말고 맞설 힘을 길러야 한다. 질병을 앓은 뒤 회복하면 몸이 더 단단해지듯, 시련을 통해 인간의 정신은 더 성숙해진다. 니체 역시 가장 힘든 시기를 견뎌냈기에 세계적 철학자의 명성에 걸맞은 작품을 남길 수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을 통과하지 않았다면 위대한 사유와 작품이 세상에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귀스타브 르그레의 사진 ‘물위의 범선’. 쇼펜하우어는 배가 안전하게 항해하려면 바닥짐을 실어야 하듯 인간에게도 적정선의 고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쇼펜하우어는 배가 앞을 향해 안전하게 항해하려면 바닥짐을 실어야 하듯 인간에게도 어느 정도의 걱정과 고난, 고통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평형수가 없는 배가 항로를 잃듯 고통이 없는 삶은 균형을 잃기 쉽다. 그는 “현실이 아무리 아름답고 행복하며 우아하다 해도, 우리는 언제나 중력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간다. 이러한 영향을 끊임없이 극복해야 한다”고 했다. 중력이 없다면 몸이 허공에 떠오르듯 인간의 생각도 쉽게 경박하고 오만해질 것이다. 우리 삶의 하루하루는 중력을 견디듯 고통을 감내하며 겸손을 배우는 과정이다.
오히려 아무런 고통이 없는 세상은 최악일지도 모른다. 쇼펜하우어는 “대기의 압력이 없으면 우리의 신체가 파열하듯, 인간의 삶에 고난·곤궁·실패가 없다면 우리는 오만방자해져 제어할 수 없는 바보짓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고통이 없는 세상은 결국 ‘게으름뱅이의 천국’이다. 일, 고역, 노고, 고난은 거의 모든 인간이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하는 것이다. 만약 모든 소망이 손쉽게 충족된다면 남은 인생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소망이 생기자마자 즉시 충족된다면 우리는 더 이상 할 일도, 꿈도 갖지 못한다.
“모든 것이 저절로 자라고 비둘기가 구워진 채 날아다니며 누구나 열렬히 사랑하는 것을 손쉽게 얻는 곳”은 사실상 지옥이나 다름없다. 공부하지 않아도 취업과 성공이 보장된다면 좋은 세상일까? 누구나 쉽게 사랑을 얻고 결혼에 이른다면 행복할까? 공짜로 얻은 것의 가치를 모른 채 빈둥거리며 하루를 보내다 보면 삶에 염증을 느끼고 타인의 소중함조차 잊게 될 것이다.
존 에드워드 구달의 ‘권태’.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게으름뱅이의 천국’에서 인류는 따분함에 지쳐 죽음을 택하거나, 서로를 공격하고 살해하며 지금보다 더 큰 고통을 만들어 낼지도 모른다. 모든 욕망이 충족돼 더 이상 결핍이 없는 삶은 인간 본성에 맞지 않아 우리가 살아가는 데 적합하지 않다. 견딜 수 없는 따분함에서 지옥이 시작된다.
마음의 근심이 전혀 없는 것도 문제지만, 지나치게 많으면 배가 침몰하듯 삶을 무너뜨릴 수 있다. 항해할 때 적당한 짐이 있어야 파도에 흔들려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설 수 있다. 마찬가지로 고난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고 운명의 시련 앞에서 방향을 잡는 지혜를 키운다. 인생의 위기는 우리를 단단하게 만드는 자극제다. 폭풍이 치고 침몰 위기가 와도 그 순간을 견뎌내면 삶의 바닥은 더 견고해진다. 고요한 바다보다 거친 비바람 속에서 올바른 방향을 잡을 때 인생의 전환점이 마련될 수 있다.
고진감래( 苦盡甘來)는 살아남은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이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견딜만한 고통만 있다고 믿어보자. 인생의 달콤한 열매를 맛보기 위해선 쉽게 쓰러지거나 포기해서는 안 된다. 깊은 절망 속에서 자신의 한계를 경험하는 일은 성장의 단단한 바탕이 된다. 어렵게 얻는 것일수록 값지다. 고통을 통해 얻는 지혜와 통찰이 앞으로의 삶을 더 빛나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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