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안보와 언론의 자유는 때론 충돌한다. 1971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펜타곤 보고서’ 보도가 대표적인 사례다.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는 미국 정부가 감춰 왔던 베트남전의 실상을 담은 정부 보고서를 입수해 보도했고, 정부는 국가 안보를 위협했다며 소송을 제기했다가 패소했다. 국가 기밀이란 이유만으로 언론 자유를 억압할 수 없다는 기념비적인 판례의 나라에서 때아닌 보도 통제 논란이 뜨겁다. 이번 논란의 진앙도 국방부 청사 펜타곤이다.
▷‘전쟁부’로 문패를 바꿔 단 국방부 청사에서 15일 짐을 챙겨 나오는 출입 기자들 사진이 전 세계 주요 언론에 실렸다. 국방부는 최근 ‘기밀이든 아니든 모든 보도는 사전에 국방부 승인을 받으라’는 내용의 보도지침을 통보하고 이를 준수한다는 서약서에 서명해야 출입을 허락하겠다고 발표했다. 사전 검열이나 다름없는 보도지침에 항의하는 뜻에서 기자 40여 명이 출입증을 반납하고 제 발로 걸어 나온 것이다. 서약서에 서명한 매체는 강경 보수 원아메리카뉴스 한 곳뿐이라고 한다.
▷폭스뉴스 앵커 출신인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45)은 취임 이후 정례 브리핑을 중단하고, 주요 언론의 지정석을 없애고, 기자들의 청사 내 이동을 통제해 왔다. 국가 안보를 위해서라지만 올해 3월 예멘 후티 반군 공습 정보 유출 사건이 적대적 언론관에 영향을 줬다는 분석이다. 그는 정부 고위 각료들이 모인 단톡방에 기자가 초대된 줄도 모르고 공습 계획을 공유했다. 또 아내와 남동생 등이 있는 다른 단톡방에도 공습 계획을 올린 사실이 추가로 드러나 경질될 뻔했다.
▷펜타곤 보도지침은 갈수록 험악해지는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언론 통제 실상을 보여준다. 트럼프는 정부에 비판적인 AP통신 기자의 대통령 전용기 탑승을 불허하고, CNN 기자에게 “개처럼 쫓겨나야 한다”며 막말을 퍼붓고, 자신을 풍자한 토크쇼를 내보낸 ABC방송에 “면허를 취소해야 한다”고 겁박했다. 백악관 풀기자단에 껄끄러운 기자를 빼고 극우 팟캐스트 진행자를 넣기도 했다. 비판 언론은 겁주고 우호적 매체는 우대하며 갈라치기를 하는 건 독재자들의 전형적인 언론 통제 수법이다.
▷눈엣가시 같던 출입 기자들이 사라졌으니 펜타곤은 조용해질까. 펜타곤 보고서 특종은 보고서 작성에 참여한 양심적인 전문가와 용기 있는 기자의 청사 밖 만남에서 시작됐다. 1961년 미국 정부가 감추려던 쿠바 피그스만 침공 사건이 알려진 건 늦은 밤 정부 청사의 중남미 담당 사무실에만 불이 환히 켜져 있는 것을 보고 지나치지 않은 기자 덕분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국방부 보도지침을 두둔하면서도 별 효과는 없을 것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기자들은 못 막는다(Nothing stops repor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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