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이 25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 백악관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한미정상회담을 마치고 기념촬영하고 있다. 2025.08.26. 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오벌 오피스’를 꾸미고 있다고 들었는데 밝고 황금색으로 빛나는 게 정말 보기 좋다.”
이재명 대통령은 25일(현지 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집무실 찬사’로 발언을 시작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올 1월 재집권 뒤 백악관 내 대통령 집무실인 오벌 오피스를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곳곳을 금빛 꽃병과 항아리, 황금빛 아기천사상(像) 등 왕실을 방불케 하는 소품들로 채웠다.
이 대통령은 이곳에서 열린 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취향을 콕 집어 추켜세우며 분위기를 띄운 것. 그는 “황금빛이 품격 있어 보이고 미국의 새로운 번영을 상징하는 것 같다”며 거듭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워싱턴 외교 소식통은 “이 대통령이 칭찬에 약한 트럼프 대통령을 띄우는 전략을 처음부터 분명하게 구사했다”고 평가했다. 앤드루 여 브루킹스연구소 한국석좌도 “이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을 대할 때의 일반적인 공식인 아부(flattery)를 잘 준비했다”고 진단했다.
위성락 대통령 국가안보실장은 26일 워싱턴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이 대통령이 현장에서 의연하고 자연스럽게 대처했기에 처음부터 잘 풀렸다. 대통령의 대응이 잘 됐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 李 당황시킨 ‘매복’은 없어
이날 정상회담은 두 대통령이 오벌 오피스에서 본격적인 대화를 나누기 직전까지만 해도 회의적인 시선이 적지 않았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이 회담을 약 3시간 앞두고 트루스소셜에 “한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숙청(purge)’이나 ‘혁명(revolution)’처럼 보인다. 그곳에서 사업을 할 수 없다”는 글을 남겨 긴장감은 극에 달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올 2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5월 시릴 라마포사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과 이곳에서 회담할 당시 전 세계로 생중계되는 카메라 앞에서 두 정상을 거칠게 몰아붙이고 면박을 줬다. 특히 라마포사 대통령에게는 갑자기 ‘남아공 정부가 백인 학살을 묵인하고 있다’는 확인되지 않은 동영상도 틀었다. 당시 남아공 언론들은 이를 ‘매복(ambush)’이라고 부르며 “다른 나라 정상을 의도적으로 모욕했다”고 분노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이 대통령을 당황시킬 ‘매복 공격’을 감행하지 않았다. 칭찬을 좋아하고 인정 욕구가 큰 트럼프 대통령의 성향을 감안해 이 대통령이 내놓은 발언들이 긍정적으로 작용했단 분석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다우존스 지수의 상승세를 언급하며 “미국이 다시 위대해지고 있다”고 칭찬했다. 트럼프 대통령 덕분에 미국 경제가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 또 트럼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중동, 아시아, 아프리카 등 세계 각지의 분쟁지에서 평화를 조성하는 ‘피스메이커(peace maker)’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도 부각했다. 노벨 평화상 수상을 강하게 원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입맛에 맞는 칭찬이었다.
이 대통령은 이날 의자 앞부분에 앉아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트럼프 대통령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했다. 역시 상대에 대한 ‘존중’을 최대한 보여주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 美전문가와 외신 “트럼프 비위 맞추기 성공”
워싱턴 주요 싱크탱크의 한미 관계 전문가들도 이 대통령의 ‘트럼프 비위 맞추기 전략’이 성공했다고 입을 모았다. 여 석좌는 “회담이 ‘난장판(trainwreck)’으로 되는 걸 피한 것만으로도 승리”라고 평가했다. 브루스 클링너 맨스필드재단 선임연구위원도 “‘지나친 아부(obsequiousness)’는 트럼프를 다루는 최선의 방식”이라고 진단했다.
이날 중국 견제를 위한 한미 동맹 현대화, 대만 유사시 주한미군 투입 같은 민감한 사안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은 점에도 주목했다. 패트릭 크로닌 허드슨연구소 석좌는 “동맹 현대화 같은 까다로운 의제를 (정상회담에서 다루는 대신) 실무단으로 넘기고, 산업 협력의 세부 사항을 불분명하게 두는 방식으로 트럼프와 효과적으로 협력했다”고 밝혔다.
주요 외신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이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북한에 ‘트럼프 월드’를 지어 내가 그곳에서 골프 칠 수 있게 해달라”고 한 농담에 주목하며 이 같은 발언이 트럼프 대통령의 미소를 끌어냈다고 전했다. 정치매체 폴리티코는 이 대통령이 “공개 회담을 무사히 넘겼고 농담까지 나누며 트럼프를 매료시켰다”며 “아첨은 끊임없었고 과도하기까지 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을 상대하는) 외국 지도자들 사이에선 일종의 관례”라고 논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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