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박 6일’ 일본·미국 순방 일정을 마친 이재명 대통령과 김혜경 여사가 28일 새벽 경기도 성남 서울공항을 통해 귀국해 인사하고 있다. 2025.8.28. 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이재명 대통령이 27일 3박 6일에 걸친 일본, 미국 순방을 마치고 귀국했다.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글로벌 통상·안보 질서 재편 속에 열린 첫 한미 정상회담이 마무리되면서 실용주의를 내건 이 대통령의 외교 전략이 윤곽을 드러냈다.
이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일본 총리와의 정상회담을 통해 한미·한미일 공조가 이재명 정부 외교의 중심축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 대통령은 25일(현지 시간) 백악관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위안부 합의 등 한일 과거사 문제를 거론하자 “미국에 오기 전 일본을 방문해 양국 간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했다. 이 대통령은 방일 직전엔 위안부 합의와 징용 배상 문제에 대해 “국가로서 약속이므로 뒤집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이어진 미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초청 강연에선 “과거 한국은 ‘안미경중(安美經中·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의 태도를 취한 게 사실이지만 이제 과거와 같은 태도를 취할 수 없는 상태가 됐다”고 강조했다.
한일 과거사 문제와 이른바 안미경중 등 중국과의 관계 등 한미·한미일 공조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됐던 현안에 대해 과거 민주당 정부는 물론이고 취임 전 발언과도 달라진 입장을 선제적으로 밝힌 것이다. 자신의 ‘친중·반일’ 이미지를 불식시키는 반전 카드로 상대국에 정치적 효능감(efficacy)을 줘 신뢰를 구축하는 전략이다.
반면 미국과의 관세 협상과 주한미군 전략적 유연성 확대 등 안보 협상, 일본에 대한 과거사 사죄 요구 등 이견이 큰 난제들은 언급을 최소화하며 뒤로 미뤘다. 한 전직 고위 외교관은 “가시적인 성과는 제한적이었던 것이 사실”이라면서도 “상대에게 정치적 상징성이 큰 성과를 제공하면서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민감한 현안에 대한 협상을 이어갈 수 있는 모멘텀을 마련하는 ‘선제 양보(pre-emptive concession)’ 전략”이라고 분석했다.
국방비 증액 제시-日 먼저 방문… 선제적 카드로 외교 모멘텀 마련
[美日 순방 이후] 정치부장의 D브리핑 李, 동맹 현대화 요구에 ‘국방비’ 대응 先방일 카드로 한미일 공조 부각… 파격적 선제조치, 외교 지렛대 확보 투자 방식 등 실질 결과물은 숙제로… 한중관계 구상도 곧 시험대 오를듯
美서재필기념관 찾은 李, 무궁화 심어
이재명 대통령과 김혜경 여사가 26일(현지 시간) 미국 필라델피아의 서재필 기념관을 방문해 광복 80주년 기념식수로 무궁화 나무를 심고 있다. 한국 대통령이 서재필 기념관을 방문한 것은 1999년 7월 고 김대중 전 대통령 이후 26년 만이다. 필라델피아=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이재명 대통령이 한국의 국방비 지출 증액을 먼저 약속하고, 한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미국보다 일본을 먼저 방문한 것 역시 후속 협상을 고려한 전략적 양보로 분석된다.
이 대통령은 25일(현지 시간) 미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강연에서 “국방비를 증액할 것”이라며 “한국은 한반도의 안보를 지키는 데 있어 더욱 주도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국방비 지출 증액과 한국의 한반도 방어 주도는 집권 2기 트럼프 행정부가 요구하고 있는 ‘동맹 현대화’의 핵심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이 국내총생산(GDP)의 5%로 국방비 지출을 확대하기로 한 것을 핵심 성과로 꼽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 대통령이 국방비 지출 증액과 한반도 방어 주도를 선제적으로 꺼낸 것은 ‘동맹 현대화’ 요구에 적극적으로 대응해 전략적 유연성 등 양국의 의견이 엇갈리는 민감한 현안에 대한 지렛대(leverage)로 삼으려는 포석이다.
실제로 이 대통령은 ‘동맹 현대화’의 원칙으로 미국의 대한 방위 공약과 한미 연합 방위 태세는 유지돼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했다. 국방비 지출 증액으로 한국이 한반도 방어를 주도해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이 확대되더라도 한국이 중국의 대만 침공 등 국제 분쟁에 끌려 들어가거나 확장억제가 약화될 위험을 차단하는 안전장치가 필요하다는 취지다.
미국에 앞서 일본을 먼저 방문하는 선(先)방일 카드도 한일·한미 정상회담의 화두로 오르며 주효한 카드가 됐다. 이시바 총리를 먼저 만나면서 미국과의 관세·안보 협상에 대응한 협력 체계를 구축하는 동시에 트럼프 대통령에게도 미국의 안보 전략에 동참한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부각할 수 있게 된 것. 트럼프 대통령은 조 바이든 전 대통령이 한미일 협력체제 구축을 자신의 최대 외교 성과 중 하나로 꼽는 데 대해 “한국과 일본이 협력을 시작한 것은 나 때문”이라고 강조해 왔다.
파격적인 선제 조치로 주목을 끌어 주도권을 쥐려는 이 같은 전략은 이 대통령이 성남시장과 경기도지사, 더불어민주당 당 대표를 거치면서 보인 공격적인 대응과도 맞닿아 있다.
다만 정상회담을 통해 구축된 신뢰와 우호적인 분위기를 실질적인 결과물로 이어가는 일이 숙제로 남았다. 한미 당국은 순방이 마무리된 26일까지 미국 워싱턴에서 실무협상을 이어갔지만 정상회담 결과를 담은 공동 문서를 내는 데는 실패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제·통상 안정화와 한미 동맹의 현대화, 새로운 협력 분야 개척 등 한미 정상회담 3대 의제의 디테일을 둘러싼 이견은 여전히 크다는 얘기다.
실제로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은 26일(현지 시간) 트럼프 대통령이 주재한 내각회의에서 “한국과 일본은 9000억 달러(약 1260조 원)를 제공해 미국의 국가·경제 안보에 투자(invest)하기로 했다”고 주장했다. 9000억 달러는 미국이 관세 인하 대신 한국이 조성하기로 한 대미 투자펀드 3500억 달러(약 490조 원)와 일본의 5500억 달러(약 770조 원)를 합친 것이다. 한국과 일본은 이들 펀드가 대부분 대출(loan)과 보증(guarantee)으로 이뤄졌다는 입장이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여전히 직접 투자(invest)로 보고 있는 셈이다. 주한미군 전략적 유연성도 언제든 한미 갈등으로 번질 수 있는 이슈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외교적 공간을 확보하려는 이재명 정부의 구상도 곧 시험대에 오를 것으로 전망된다. 10월 31일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는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習近平)이 참석할 전망이다. 중국 관영 글로벌타임스는 27일 사설에서 이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미국의 세계 전략 아래 한국의 국익이 종속될 수 있다”고 압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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