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과 지도부 의원들이 설 연휴를 앞둔 1월 24일 오전 서울 서초구 반포동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설 귀성객에게 인사하던 중 함께 셀카를 사진을 찍고 있다. 뉴스1
설 연휴 동안 ‘이러다 우리 다 죽는다’는 처절한 민심을 듣긴 들은 건지, 여야 모두 연휴가 끝나기 무섭게 각각 ‘민심’을 키워드로 내세운 기자간담회를 열고 서로 자신들이 민생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했습니다.
국민의힘 권성동 원내대표는 설 연휴 마지막 날인 30일 기자간담회를 열고 “설 명절을 맞아 고향을 찾아 반가운 분들을 만나 뵙고 여러 말씀을 들었다. 나라가 망가진 것 같단 걱정의 말씀을 많이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국민의힘은 민생안정을 최우선 목표로 두고 국민들의 먹고사는 걱정을 덜어드리고 작금의 국정 위기 극복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습니다.
같은 날 더불어민주당 김민석 최고위원도 기자간담회를 열고 “(설 연휴 동안) 민주당을 향해 전국 곳곳에서 가장 많이 쏟아진 주문은 ‘(윤 대통령 탄핵을) 빨리 끝내고 경제를 살리라는 것’”이라며 “민심의 요구에 따라 경제 회생과 그를 위한 중장기 성장전략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했습니다.
말들은 참 번지르르하지만 당장 2월 임시 국회를 앞두고 눈 앞에 쌓여있는 추가경정예산(추경)과 연금 개혁 등 시급한 과제에 대해서도 여야는 계속 입씨름만 이어가고 있습니다. 최대 ‘캐스팅 보터’ 중도층 표심은 잡아야겠으니 경쟁적으로 떠들기는 하는데 정작 논의는 전혀 진전시키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연휴 다음날 정부에 추경 편성을 촉구하면서 그동안 자신이 요구해 온 ‘전국민 25만 원 민생회복지원금’도 포기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흡사 통 큰 양보 같아 보이지만 악마는 디테일 속에 숨어 있죠.
그는 “효율적인 민생 지원 정책이 나오면 (민생회복지원금 예산이 포함되지 않아도) 상관이 없으니 추경을 편성해달라”고 조건을 달았습니다. 민주당 관계자도 이날 당 회의 후 백브리핑에서 “정부가 일단 추경안을 갖고 오면 그 때 논의하겠다”고 부연했습니다. 결국 정부더러 마음에 드는 안을 들고 오라는 겁니다.
국민의힘 권성동 원내대표가 2월 2일 국회에서 현안 관련 기자간담회를 하기 위해 자리하고 있다. 권 원내대표 뒤로 ‘국정안정, 책임을 다하겠습니다’라는 백드롭이 걸려있다. 뉴스1게다가 국정을 운영해야 할 여당은 매번 될 일도 도리어 더 안 되게 만드는 재주가 있죠. 국민의힘 김상훈 정책위의장은 이날 “(민주당이) 추경을 입에 올리려면 작년 연말 예산안의 일방적 삭감 강행 처리에 대한 대국민 사과가 우선”이라고 했습니다. 계엄 후폭풍 속 민주당이 사상 초유의 야당 수정안을 단독으로 처리한 것에 대해 사과부터 하라는 겁니다.
이어 2일엔 권성동 원내대표도 기자간담회를 열고 이 대표가 민생회복지원금도 포기할 수 있다고 언급한 것에 대해 “악어의 눈물”, “요란한 변신술”이라고 맹비난하면서 “진심이라면 여야정 협의체부터 복귀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민주당 김윤덕 사무총장은 같은 날 기자간담회를 열고 “(정부여당이) ‘추경을 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해 주는 게 논리적으로 보면 우선”이라고 다시 맞받았고요. 김 사무총장은 “여야정 협의체든 뭐든 어떤 거라도 할 수 있으면 해야 한다는 게 기본 입장이지만, 국민의힘과 정부가 (추경 관련) 입장을 분명히 해달라”라며 이같이 말했습니다.
다음날 이 대표 역시 “권 원내대표가 또 거짓말을 하던데 국민의힘은 거짓말이 전매특허인가”라며 “국민의힘의 추경 거부로 협의체 실무협의가 진행이 안 되는 건데 왜 야당이 불참한 것처럼 얘기하느냐”고 강하게 반발했고요.
추경은 무조건 타이밍이 관건인데, 이런 식으로 매일 이어지는 기싸움 속에서 건전한 논의가 진전되긴 어려워 보입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2월 3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 앉아있다. 이 대표는 뒤로 ‘회복과 성장, 다시 대한민국’이라는 백드롭이 걸려있다. 뉴시스지난해 타결 직전까지 갔다가 막판에 엎어져 원점으로 돌아간 연금개혁 문제를 두고도 여야는 여전히 도돌이표만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선(先) 모수개혁, 후(後) 구조개혁’인지, ‘모수개혁과 구조개혁 동시 추진’인지, 그리고 이를 소관 상임위인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에서 논의할 지 아니면 별도로 국회 차원의 연금개혁특위를 구성할지를 두고 샅바싸움만 하고 있죠.
모수개혁은 국민연금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 즉 내는 돈과 받는 돈을 조정하는 개혁이고, 구조개혁은 국민연금에 퇴직연금과 기초연금 등을 연계해 연금제도 전체를 다시 설계하는 것을 말합니다.
민주당 진성준 정책위의장은 설 전날 성명을 내고 “국회 복지위원회 차원에서 모수개혁부터 합의 처리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는 “민주당은 보건복지위원회에서 시급한 모수개혁부터 합의 처리하자는 입장을 누차 밝혀왔다. 매번 양당 정책위의장 회동 때도 이러한 연금개혁 입장을 밝혔지만 국민의힘이 이를 거부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국민의힘이 연금개혁에 대해) 진정성이 있다면 시급한 모수개혁부터 2월 안에 끝내자. 복잡하고 논의가 길어질 구조개혁은 국회 연금개혁특위를 구성하고 조속히 논의를 시작하면 된다”고 했죠.
하지만 이틀 뒤 권성동 원내대표는 국회에 연금개혁 특위부터 구성해 구조개혁과 함께 해야 한다고 반박했습니다. 그는 “연금개혁은 사학연금 군인연금 기초연금 노령연금과 다 연결돼 있고 관련 부처도 5개다. 모수개혁을 해 봤자 연금 고갈 상태를 5~7년 지연시키는 효과밖에 없다”며 “지난 21대 국회에서도 특위가 구성돼 가동됐고, (민주당 출신인) 우원식 국회의장도 연금특위 구성에 동의했는데 왜 민주당이 국회 보건복지위 차원에서 모수개혁만 고집하는 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논의 자체가 이뤄지지 못하고 미뤄지는 데에 대한 책임을 또 서로에게 돌린 겁니다.
동아일보 DB이재명 대표는 그 다음 날 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지난해 자신이 국민의힘에서 주장하던 소득대체율 44%안을 받아들이겠다고 제안했던 점을 재차 강조하며 “막상 민주당이 양보를 해서 합의가 될 것 같으니까 (국민의힘이) 갑자기 태도를 돌변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국민의힘은) 44%에다가 구조개혁을 동시에 해야 한다는 이런 이상한 조건을 붙였다. 구조개혁이 그렇게 쉽게 되나? 안 되지 않나. 그래서 모수 개혁만 합의하자고 했던 것 아닌가”라며 “자꾸 조건 붙이지 말고 신속하게 모수개혁부터 2월 안에 매듭짓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국회 보건복지위원장인 민주당 박주민 의원도 이날 권 원내대표를 향해 “복지위 차원에서 연금개혁 논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니 다시 특위 구성을 하자면서 시간끌려는 이유가 뭐냐”며 “개혁논의가 진행되면 허물고, 원점에서 다시 논의하자는 것은 개혁하지 말자는 것 아니냐”고 따져 물었고요.
마치 손에 시한 폭탄을 든 채 서로에게 떠넘기는 가족오락관 느낌입니다. 연금 개혁이 지연되면서 매일 적자가 885억 원씩, 한 달이면 약 2조7000억 원이 쌓인다는데 여야는 저렇게 한가하게 시간을 허비하고 있습니다. 한 민주당 핵심 관계자는 “국민의힘은 연금이든 추경이든 이 대표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뭐가 됐든 이재명의 성과로 만들어 주긴 싫을 테니 말이다”라고 했는데 차라리 그게 솔직해 보입니다. 그 어디에도 정치는 없는 듯 합니다.
이번 설 연휴 기간 전 세계가 중국발 저가 AI 모델인 ‘딥 시크’ 쇼크에 휩싸여 충격에 빠졌습니다. 남들은 이미 AI 전쟁에 한창인데 우리 정치는 여전히 이재명이 경제를 살리자며 “검든 희든 쥐만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 아닌가”라고 말했다고 “중국 공산당이 내놨던 흑묘백묘론”(국민의힘 권영세 비상대책위원장)이라며 철 지난 색깔 논쟁이나 벌이는 수준입니다. 이런 여야에 민생경제 회복을 기대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검든 희든, 여든 야든 저렇게 입만 살아서는 다음 대선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점부터 깨닫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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