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의 장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반세기 동안 북한을 지켜봐온 주성하 기자의 시선으로 풀어봅니다.
시선1# 김옥주의 ‘천하’는 언제까지?
2021년 7월 11일, 김정은과 북한 예술인들이 함께 찍은 사진. 원 안의 여성이 가수 김옥주다. 그는 김정은의 어깨와 허리에 손을 얹어 친밀감을 과시했다. 동아일보 DB
요즘 김정은의 관심은 새로 건조한 5000톤급 구축함 ‘최현호’에 꽂혔습니다.
재작년엔 정찰위성에 집착해 한 기를 쏘고 그해 연말 노동당 중앙위 8기9차 전원회의에서 “2024년에 3개의 정찰위성을 추가로 쏴올릴 데 대한 과업을 천명”했다고 하지만, 이 약속은 현재까진 전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작년의 관심사는 건설이었습니다. 평양 화성지구 건설을 비롯해, 압록강 수해 현장 건설 등에 분주히 찾아가 시찰을 했습니다.
김정은은 늘 새로운 것을 가지는데 집착하는 성격으로 보입니다. 김정은의 뇌를 좌우하는 4가지 호르몬(도파민, 엔도르핀, 아드레날린, 세로토닌)은 주로 “드디어 나도 가졌다”는 성취감에 가장 자극적으로 반응하는 것 같습니다. 지속 또는 유지와 같은 이후에 일어날 일들은 그를 흥분시키지 못하는 듯 합니다.
올해는 지금까지 볼 때 최현호가 그의 성취감을 가장 자극한 것 같습니다. 그는 4월 25일 남포항에서 열린 진수식에 참가해 낮부터 밤까지 이어진 행사 내내 앉아있었습니다. 그의 얼굴은 정말로 행복해 보였습니다.
28일과 29일 이틀 동안 진행된 최현호 무기 발사 실험에도 꼬박 참가했습니다. 이런 모습은 2023년 11월 21일 첫 정찰위성을 발사한 뒤 하루가 멀다하게 국가항공우주기술총국 평양종합관제소를 찾아가 “오늘은 어디를 찍었다”며 자랑하던 때와 흡사합니다.
최현호 진수를 경축하는 예술단 공연무대. 군인들이 차렷 자세로 서서 공연을 관람하고 있다. 조선중앙TV 캡처최현호 진수를 경축하는 행사의 마감은 해군이 주최한 연회와 중앙예술단체들의 축하공연으로 마무리됐는데, 늘 그랬듯이 어둠 속에서 화려한 축포와 함께 진행됐습니다.
북한은 2018년 탁현민 당시 청와대 의전비서관이 현송월에게 “열병식을 밤에 하는 것이 좋다”고 한 뒤로부턴 계속 야간에 행사를 진행합니다.
탁 비서관은 “(행사를) 밤에 해야 조명을 쓸 수 있고, 그래야 극적 효과가 연출된다. 보여주고 싶은 것만 밝게 보여주고, 보여주고 싶지 않은 부분은 어둡게 만들어버리면 된다. 그래서 밤 행사가 낮 행사보다 감동이 배가된다”고 말했다고 2022년에 회상했습니다.
그 말을 따라 밤에 해보니 김정은의 감동이 배가됐는지, 이젠 야간 행사가 북한의 표준으로 굳어졌습니다.
최현호 진수식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북한은 이날 행사를 1시간 넘게 방영했습니다. 그런데, 이날 공연에서 기자의 눈길을 끈 것은 화려한 축포도, 공연 내내 줄을 맞춰 차렷 자세로 서있던 해군 장병들도 아니었습니다.
가수 김옥주가 공연 내내 거의 혼자 노래를 부르는 것이 가장 눈길이 갔습니다. 새 것을 좋아하는 김정은과 어울리지 않게, 김옥주는 지금까지도 계속 김정은의 신임을 듬뿍 받고 있는 것입니다.
1985년생으로 김정은보다 한 살 어린 것으로 알려진 김옥주는 이설주의 금성학원 선배라고 합니다. 김옥주는 2021년 6월 20일 김정은이 참석한 노동당 제8기 3차전원회의 축하 국무위원회연주단 공연에서 전체 26곡 중 22곡을 홀로 불러 주목을 받았던 가수입니다.
앞서 2월 열린 ‘설명절 경축 공연’에선 김정은의 앵콜을 두 번 받아 한 무대에서 같은 노래를 세 번이나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 김옥주가 이후 4년 가까이 별로 주목을 받지 않았지만, 이번 행사를 통해 김정은의 신임을 여전히 넘치도록 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김옥주는 은하수관현악단 시절이던 2012년 설 명절 공연에서 이설주와 함께 공연했던 가수입니다. 물론 그땐 쟁쟁한 여가수들이 많아 김옥주는 특별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2018년 4월 평양공연 때 가수 이선희와 함께 노래 ‘J에게’를 함께 부르는 김옥주. 유튜브 캡처.2018년 4월 3일 ‘남북 평화협력 기원 남측 예술단’ 공연 때 김옥주는 이선희와 함께 ‘J에게’를 불렀습니다. 한국에서 그의 이름을 알게 된 계기였습니다. 당시 김옥주는 소좌(소령) 계급의 모란봉악단 성악과장이었습니다.
2018년 2월 북한 예술단의 방한 공연 때만 해도 송영, 류진아, 라유미, 김주향 등 유명 여가수들이 많이 활동했는데, 지금 이들은 모두 어디론가 사라지고 오직 김옥주만 홀로 살아남았습니다.
김정은 시대 수많은 숙청의 바람이 불었지만, 김옥주는 은하수·청봉·모란봉·삼지연 악단에 이어 현재의 국무위원회연주단까지 무려 5개의 예술단을 거치며 살아남았습니다.
2021년엔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는데, 계급도 대좌(대령) 이상급으로 승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정은의 신임만 받으면 사실 계급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대좌도 대장 이상의 발언권이 있는 것입니다. 김옥주에 대한 김정은의 따뜻한 순정은 언제까지 이어질까요.
이달 5월 9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진행되는 제2차 세계대전 승리 80주년 기념일 행사에 북한의 열병식 부대와 공연단이 참가한다는 말들이 흘러 나오고 있습니다.
쿠르스크 전투에 참가한 북한 특수부대들이 열병식에 나올 법도 하지만, 북한은 그러지 않을 겁니다. 북한은 열병식 참가 군인을 키 172㎝ 이상만 뽑는데, 그래야 누가 봐도 북한군이 멋있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특수부대는 키가 작은 군인들도 많기 때문에, 일부러 열병식에 부대를 보낸다면 북한에서 따로 보내게 될 것입니다.
공연단이 가게 되면 김옥주가 가게 될까요. 그가 또 모스크바에서 독무대를 펼치는 모습을 보게 될지 모릅니다.
그럼 김옥주는 노래를 얼마나 잘 부를까요? 궁금하다면 아래 링크에서 확인해보십시오. 2018년에 당시 54세였던 이선희와 33세였던 김옥주가 함께 ‘J에게’를 부르는 영상입니다.
북한이 4월 25일 진수한 5000톤급 구축함 ‘최현호’. 뉴스1. ‘최현호’ 진수식 관련 일련의 행사에서 여러 가지 눈길을 끄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12살에 2차 성징까지 끝난 것으로 보이는 김주애가 아버지와 그 어느 때보다도 화기애한 분위기를 연출했던 것도 그렇고, 최현호에 설치된 5인치(127㎜) 함포에도 관심이 갔습니다.
함포의 경우 러시아와 중국 등 북한의 동맹국들은 대구경 함포로 130㎜를 사용합니다. 127㎜ 함포는 미국과 한국 등 서방 선진국들이 쓰는 대구경 함포의 표준입니다. 북한이 왜 굳이 동맹국의 무기 체계를 사용하지 않고, 서방 국가들의 무기 체계를 차용했는지는 앞으로 계속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최현호 진수식에서 나란히 걷고 있는 김정은과 김주애. 12살인 김주애는 어느새 김정은과 키가 같아졌다. 조선중앙TV 캡처. 그런데 이날 행사에서 시각적으로 가장 눈길을 끈 것은 북한 해군 정복의 변화입니다. 병사들의 군복은 아직 바뀌지 않았지만, 군관(장교)들의 군복은 남녀 모두 달라졌습니다. 최근 북한 육군의 복장이 ‘중국화’가 되고 있는데, 해군 역시 그러했습니다.
김정과 김주애가 해군 장병들을 격려하고 있다. 뉴스1. 군관들의 제복에서 견장(계급장)이 사라졌습니다. 대신 오른쪽 가슴에 계급과 이름이 새겨진 것으로 보이는 명찰이 붙었습니다. 명찰 위에 붙은 마름모 모양의 배지는 ‘해군군관학교’를 이수한 자들에게 주는 졸업 배지로 보입니다. 여군의 모자도 달라졌습니다.
해군 소속 여군들의 정복이 과거와 달라진 것이 눈에 띈다. 뉴스1. 이것이 왜 중국을 따라했다고 할 수 있는지 아래 사진들을 보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아래는 중국군 제복인데, 해군만 견장이 없습니다. 북한도 지금 그렇게 바뀌었습니다. 중국군 해군 정복만 따로 살펴봐도 북한과 같습니다.
중국 육해공 장교 제복.
중국 해군 장교 제복. 물론 북한 해군의 복장은 한국 해군과 닮았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우리도 해군 장교복에 견장이 없고, 여군 모자도 비슷합니다.
중국이나 한국의 해군 정복이 크게 차이가 없었다고 볼 수 있었는데, 북한이 뒤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동안 북한은 인민복 스타일의 군복을 착용했는데, 이제 인민복을 버리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과거 북한 해군 군복 모습. 사진 속 여성들은 해군 군복을 입은 군 협주단 배우들이다. 동아일보 DB. 이것이 해군에게서만 일어나는 변화는 아닙니다.
북한 중학생 교복도 과거엔 목까지 단추를 닫는 인민복 스타일이었지만, 지금은 옷깃이 있는 양복으로 바뀌었습니다.
올해 새로 지급된 고등학생 교복. 옷깃이 있는 양복 모양으로 바뀌었다. 뉴스1. 앞으로 육군이나 공군도 인민복을 버릴지 주목해야 할 것 같습니다.
북한에서 교복이나 정복의 변화를 지시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김정은입니다. 김정은의 지시 없이 함부로 옷을 변화시켰다가 목숨을 내걸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유추해볼 때 인민복은 김정은의 취향이 아니라는 의미기도 합니다.
그의 부친 김정일은 인민복 스타일과 잠바를 고집했지만, 김정은은 취향이 달랐던 것 같습니다. 물론 2018년 4월 판문점 남북정상회담이나 그해 6월 싱가포르 북미 회담 때처럼 가끔 인민복을 입을 때가 있긴 하지만, 북한 내부에선 그런 옷을 거의 입고 다니지 않습니다.
목을 조이는 인민복이 싫었을까요. 그런데 북한에서 인민의 목을 조이는 것은 옷이 아닌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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