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2월, 업계 동료의 이 한마디가 20대 여성 이모 씨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동료가 알려준 일본 소재 Y사이트에는 이 씨라는 걸 금세 알 수 있는 나체 영상이 걸려 있었다. 경찰에 신고한 뒤 알게 된 사실은 더 충격적이었다. 태국 소재 C사이트 등 플랫폼 2곳에서도 어떻게 촬영됐는지 모를 이 씨의 영상이 유통되고 있었던 것. 그는 불안에 떨며 사설 업체에 착수금 200만 원을 주고 영상을 없애 달라고 의뢰했지만, 이미 퍼진 영상을 모두 삭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최근 불법 촬영물이 텔레그램 등 잘 알려진 플랫폼을 벗어나,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낮은 해외 플랫폼으로 옮겨가는 조짐이 뚜렷하다. 텔레그램이 불법 촬영물 확산의 주요 통로로 지목된 후 서비스 약관 등을 바꿔 불법 행위를 한 사용자의 정보를 수사기관에 제공하자, 수사망을 피하기 위해 이른바 ‘n번방 망명’을 시도하는 것이다.
● 마이너 플랫폼에 들어선 ‘불법 촬영물 장터’
또 다른 20대 여성 임지은(가명) 씨는 올 6월 미국 소재 P애플리케이션(앱)에서 자신의 은밀한 신체 부위가 노출된 영상을 발견했다. 남자 친구와 함께 있을 때 찍힌 것이었다. 혼비백산한 임 씨는 남자 친구 몰래 그의 휴대전화를 열어봤고, 남자 친구가 임 씨뿐만 아니라 최모 씨 등 전 연인들의 수많은 불법 촬영물을 P앱과 B앱 등에 업로드한 기록을 확인했다.
이 사실을 임 씨로부터 전해 들은 최 씨도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최 씨는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새로운 사이트에서 제3자가 재유포한 것으로 추정되는 영상이 계속 발견되고 있다”며 “언제 어디서 또 영상이 나타날지 몰라 하루하루가 두렵다”고 호소했다. 임 씨와 최 씨는 이 남성을 서울경찰청 사이버수사대에 고소했다.
27일 취재팀이 직접 B앱에 접속해 ‘영상’ ‘영상 판매’ 등의 키워드를 검색해 보니, 여성의 신체 부위가 드러난 사진과 함께 “영상을 판다”는 글이 무더기로 올라와 있었다. B앱은 X(옛 트위터)처럼 게시글, 댓글, 메시지 기능을 제공하는데, 이용자들은 주로 판매자가 올린 영상 샘플을 보고 쪽지(DM)로 계좌번호를 교환하고 있었다.
P앱의 경우 구조가 더 노골적이었다. 영상을 사고팔며 이익을 얻을 수 있는 형태였는데, 상단에 노출된 크리에이터 프로필을 누른 뒤 하단에 제시된 링크만 클릭하면 불법 촬영물들이 ‘미리 보기’ 형태로 쉽게 드러났다.
● 전문가 “국제 공조 없이는 무력”
이런 마이너 플랫폼의 문제는 본사와 서버의 소재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영상 삭제나 유포범 추적 요청에 응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연락 자체가 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국내 제도도 한계가 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는 불법 촬영물이 올라오면 접속 차단이나 삭제를 요청할 수 있지만 강제할 권한은 없다. 성범죄 전문 김지진 변호사는 “이름조차 생소한 마이너 플랫폼에 불법 촬영물이 유통돼 피해자가 고통을 겪는 사건이 한 달에 한 번꼴로 있다”고 우려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성범죄처벌법상 불법 촬영물 제작·유포 피해는 늘고 있다. 경찰청이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양부남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관련 범죄 검거 건수는 2020년 5032건에서 지난해 7202건으로 4년 새 43.2% 증가했다.
전문가들은 국제 공조를 통한 사이버범죄 대처를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이버범죄 처벌과 신속한 국제 공조를 규정한 ‘부다페스트 협약’에 가입해야 한다는 제언도 나온다. 한국은 2023년부터 가입을 추진하고 있지만 수사 중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기록 등이 삭제되지 않도록 하는 ‘보전 요청’ 제도가 미비해 승인되지 않고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법안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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