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four)에버 육아’는 네 명의 자녀를 키우며 직장 생활을 병행하고 있는 기자가 일상을 통해 접하는 한국의 보육 현실, 인구 문제, 사회 이슈를 담습니다. 단순히 정보만 담는 것을 넘어 저출산 시대에 다자녀를 기르는 맞벌이 엄마로서 느끼는 생각도 공유하고자 합니다.
조만간 ‘육아휴직’이 ‘육아집중기간’이나 ‘육아몰입기간’이라는 이름으로 바뀔지도 모르겠다. 지난달 29일 열린 제13차 인구비상대책회의에서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는 육아휴직이라는 용어가 ‘쉬러 간다’라는 인식을 줄 수 있다며 대체 용어를 마련하고 있다고 밝혔다. 32개 안을 대상으로 이달 20일까지 국민 온라인 설문을 진행했는데, 결과를 바탕으로 논의를 거쳐 오는 9월 정기국회에 관련 법령 개정안을 제출할 예정이다.
인식을 바꾸려는 시도 자체는 의미 있다. 기자 역시 저출산 대응에는 사회적 인식 개선이 병행돼야 한다고 줄곧 말해왔다. 언어가 사고를 형성한다는 ‘프레임 효과’도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이번 용어 변경의 경우 어쩐지 마냥 반갑지만은 않다.
주형환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저출산위) 부위원장이 지난달 29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제13차 인구비상대책회의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뉴시스● 도입 40년 돼 가는데…출생아 부모 10명 중 3명만 써
영어권에서 육아휴직은 ‘parental leave’ 혹은 ‘maternity leave’라 불린다. 휴직에 해당하는 leave는 말 그대로 ‘일터를 떠남’이라는 뜻으로 병가(sick leave), 연차휴가(annual leave), 무급휴가(unpaid leave) 등에도 공통으로 쓰인다. 즉 서구에서도 육아휴직에만 특별한 명칭을 붙이지 않고 다른 휴가, 휴직과 동일한 용어를 사용한다.
그런데 우린 어쩌다 용어 변경을 고민하게 됐을까. 육아휴직 제도가 1988년 도입돼 벌써 그 역사가 40년 가까이 됐지만 이용 성적이 여전히 저조한 탓이다.
2023년 기준 전체 육아휴직자 수는 19만5986명인데 해당 연도 출생아 부모를 기준으로 육아휴직 사용률은 32.9%에 그친다. 10명 중 3명도 채 안 썼다는 이야기다. 출산 직후 대부분 육아휴직을 사용하고 싶어 하는 점을 고려하면, 여전히 많은 이들이 제도를 이용하지 못하거나 이용할 수 없는 처지임을 짐작할 수 있다.
낮은 이용률을 초래한 다양한 원인 중 하나가 육아‘휴직’이란 용어에서 비롯됐다는 게 정부 생각이다. 실제 내가 첫째, 둘째를 임신했을 10여 년 전만 해도 ‘육아휴직 한다’라고 하면 “잘 쉬고 와”라거나 “쉬니까 좋겠다”라는 말을 대놓고 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요즘은 그렇게 노골적인 반응은 드물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생각하는 이들이 많을지 모른다.
만약 용어를 바꿔서 육아휴직의 가치가 재정립되고, 부정적인 시선이 줄어들어 더 많은 사람이 제도를 이용할 수 있다면 이름은 몇 번이고 바꿀 수 있다. 열 번을 바꿔도 아깝지 않다.
서울 마포구 서부고용복지플러스센터에 육아휴직 관련 리플릿이 놓여 있다. 뉴시스● 중소기업이 99%인 산업구조…대체인력 구하기 어려워
그러나 용어 변경보다 시급한 현안이 산적한 게 사실이다. 사실 육아휴직의 가장 큰 장애물은 대체인력이다. 각종 조사에서 육아휴직을 사용하기 어려운 이유 1위로 항상 꼽히는 것이 바로 ‘대체인력 확보의 어려움’이다.
대기업도 직무에 따라 대체가 쉽지 않지만, 중소기업은 사정이 훨씬 더 심각하다. 우리나라는 전체 100개 기업 중 99개 기업이 중소기업일 정도로 소규모 기업이 많은 산업구조를 갖고 있다. 직원 수가 50명도 안 되는 곳에서 1년간의 공백은 크나큰 부담이다. 동료들에게 가해지는 부담도 클 수밖에 없다. 결국 많은 경우, 육아휴직이 인사상 불이익이나 퇴사 압박으로 이어지곤 했다.
정부는 대체인력 지원금을 대폭 늘리고, 동료 업무 지원금도 확대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녹록지 않다. 대체인력을 뽑는대도 1년짜리 계약직을 어렵게 뽑아 적응시킨 뒤 다시 내보내야 하는 상황은 고용주 입장에서 여전히 부담이다. 애초에 이런 단기직 자리에 지원할 만한 인재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다. 1년 한정의 시한부 계약에 도전하려는 유능한 인재는 많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이 문제는 보다 근본적인 해법이 필요하다. 재택근무나 시차출퇴근제 등을 도입해 기존 직원들이 평소에도 유연하게 일하면서 육아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고, 휴직의 필요성과 기간을 최소화하는 방식이 하나다. 더 나아가 일자리를 한 번 그만두더라도 다시 복귀하거나 새로운 일자리로 원활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노동시장 구조 자체를 유연하게 바꾸는 노력이 병행돼야 한다.
놀이공원에서 한 아빠가 아이 둘 손을 잡고 걷고 있다. 뉴시스● 16조 원 적자 고용보험기금, 대상자-급여 확대 어려워
현 육아휴직 사용률이 낮은 또 다른 이유는 제도에서 아예 배제된 이들이 많다는 점이다. 육아휴직급여가 고용보험기금에서 나오기 때문에, 고용보험에 가입되지 않은 자영업자, 프리랜서, 플랫폼 종사자, 단기 계약직 근로자 등은 제도에서 완전히 소외돼 있다. 이들만 해도 수백만 명에 이른다.
게다가 고용보험기금이 한계에 다다르며 급여 현실화에도 제동이 걸리고 있다. 지금은 육아휴직 초기에만 통상임금의 100%, 최대 250만 원까지 보장되지만, 이후엔 실질소득대체율이 떨어져 주요 선진국 수준에 못 미친다. 이건 재정 구조 자체의 문제다. 고용보험기금은 원래 실업급여, 고용유지지원금, 직업훈련비 등 다양한 목적을 위해 쓰인다. 그런데 육아휴직 급여가 늘면서 기금이 고갈되기 시작했고, 2022년 기준 누적적자만 16조 원에 달했다.
이런 구조에선 제도 확장도, 지원 확대도 쉽지 않다. 학계와 노동계에선 ‘부모보험’ 같은 별도 사회보험 체계를 만들자는 주장이 오래전부터 제기돼 왔다. 일반회계나 건강보험, 지방세, 교육세 등을 활용해 사회 전체가 분담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번번이 예산 당국의 반대에 부딪히거나 정책 우선순위에서 밀리며 아직도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사실 남성 육아휴직 사용률이 여성에 비해 현저히 낮은 근본적 이유도 여기에 있다. 대체로 남성이 가장인 경우가 많은 한국 사회에서 휴직으로 인한 소득 감소는 가정 경제에 주는 타격이 크다.
이런 복잡하고 구조적인 문제는 외면한 채 손쉽고 눈에 띄는 것만 건드리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다. 용어 변경을 통해 사회적 인식을 환기하고 육아휴직이 ‘쉬는 것’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주는 효과는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효과가 실제 사용률 향상으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육아휴직이 어려운 이유는 인식보다 현실에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통계청은 미성년 자녀를 둔 맞벌이 가구 비율이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겉보기에 희망적인 신호처럼 보이지만, 정작 미성년 자녀 가구 수는 줄었다. 아이 키우는 집 자체는 줄고 있다는 뜻이다. 육아휴직이 만능 해법이라 생각지 않고 사실 진정한 일·가정 양립이라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필요한 사람들은 부담 없이 쓸 수 있어야 한다. 육아휴직은 경력 단절을 막는 최후의 보루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그동안 육아휴직의 근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건 그만큼 정치권에 강한 의지가 없었던 탓도 있다. 저출산 정책에 대해 ‘생명과 미래를 위한 국가적 과제’라고 강조해 온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위원장 대통령이 부디 골치 아프고 복잡하다며 아무도 건들지 않았던 이 육아휴직의 구조적 문제에 관심을 가져주기만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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