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우리 모두 ‘길 위의 느린 보행자’가 된다 [이미지의 포에버 육아]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11월 3일 14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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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단보도 초록불 ‘1초에 0.7m 보행’ 기준
고령자 상당수 다 건너지 못해 ‘아찔’
싱가포르, 노인카드 대면 초록불 시간 연장
AI가 사람 인식 ‘스마트 횡단보도’ 시도도

‘포(four)에버 육아’는 네 명의 자녀를 키우며 직장 생활을 병행하고 있는 기자가 일상을 통해 접하는 한국의 보육 현실, 인구 문제, 사회 이슈를 담습니다. 단순히 정보만 담는 것을 넘어 저출산 시대에 다자녀를 기르는 맞벌이 엄마로서 느끼는 생각도 공유하고자 합니다.


서울의 한 차도에서 어르신이 횡단보도 중간에 서 신호대기 중인 차들을 바라보고 있다. 동아일보DB


얼마 전 쉬는 날 아이와 길을 걷다가 식겁한 경험을 했다. 교차로가 있는 8차선 도로를 건너려 횡단보도에 서 있었는데, 아이가 말했다.

“엄마, 저 할아버지는 왜 초록불로 안 바뀌었는데 건너가시지?”

시선을 돌리니 신호가 바뀌기도 전에 고령의 어르신 한 분이 차도로 들어서고 계셨다. 가까운 차로의 차량은 멈춰 있었지만, 맞은편 차도는 여전히 차들이 달리고 있었다. 어르신은 고관절이 불편하신 듯 보폭이 좁고 걸음이 느렸다. 초록불이 켜져도 다 건너지 못할까 봐, 미리 발을 떼신 모양이었다.

곧 신호가 초록으로 바뀌었다. 보행 신호는 수십 초간 이어졌다.

8살 막내와 느긋하게 걸어 건너편에 도착했지만, 어르신은 여전히 중앙선쯤에 머물러 계셨다. 그때 신호가 빨간불로 바뀌었다. “어, 어 안 되는데” 하는 새 맞은편 교차로에서 좌회전 차량들이 어르신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당황한 아이와 나는 “멈춰요! 사람 있어요!”를 외치며 팔을 흔들었다. 다행히 지나던 젊은 행인 두 명이 차도로 뛰어들어 어르신을 부축해 길을 건넜다.

폐지가 가득 담긴 수레를 끌고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는 어르신. 동아일보DB


● 8차선 도로, 50초도 버거운 노인들


“엄마, 우리 할아버지도 저렇게 길을 못 건너게 되면 어떡해?”

길을 건너온 아이가 던진 질문에 심란해졌다. 남의 일이 아니었다. 도로뿐 아니라 부모님 건강에도 적신호가 켜진 지 오래다. 칠순을 넘긴 양가 부모님은 이미 근골격계나 시력 등 노화로 인해 몸이 예전 같지 않다. 빨간불로 바뀐 8차선 한가운데 부모님이 서 계신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아찔했다.

보행 신호 시간은 보통 ‘1m를 1초에 걷는다’는 기준으로 계산된다. 서울시에 따르면 보행자 신호 시간은 ‘보행 진입 7초 + 횡단보도 길이(m)당 1초’다. 정부는 최근 고령자 통행이 많은 구간의 기준을 ‘1m당 1초’에서 ‘0.7m당 1초’로 완화했다.

이를 8차선 도로(폭 약 26m)에 대입하면 일반 구역은 약 33초, 노인·어린이 보호구역은 약 44초, 주요 교차로에서 신호를 3~6초 연장하는 경우까지 감안하면 33~50초 사이가 된다. 보통 성인은 1m를 1~1.5걸음에 건너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하지만 고령자는 1m당 네댓 걸음이 걸릴 수 있다. 앞서 본 어르신만 해도 1m 걷는 데 5초가 훌쩍 넘는 시간이 걸렸다. 실제 거리에서는 수많은 어르신이 매일 ‘빨간불 중간’에 멈춰 설 수 있다는 이야기다. 기대수명은 늘고 있지만, 건강하지 않은 상태로 보내는 ‘비건강기간’이 길어지는 만큼 보행에 어려움을 겪는 노인 인구도 점점 늘어날 것이다.

싱가포르의 ‘그린 맨 플러스(Green Man Plus)’ 교통카드. 싱가포르 육상교통청 유튜브 동영상 캡처.
싱가포르의 ‘그린 맨 플러스(Green Man Plus)’ 교통카드. 싱가포르 육상교통청 유튜브 동영상 캡처.


● 카드 대면 보행 신호 늘고, 알아서 늘려주고


가장 손쉬운 해법은 신호 시간을 늘리는 것이다. 그러나 신호를 무작정 늘릴 수는 없다. 보행 시간이 길어지면 차량 대기 시간이 늘고, 도심 교통 혼잡도 커진다.

이런 딜레마를 해소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싱가포르에서는 걸음이 느린 노인이나 장애인을 위해 횡단보도 초록불 시간을 늘려주는 교통카드를 도입했다. ‘그린 맨 플러스(Green Man Plus)’ 제도다. 노인·장애인용으로 발급된 카드를 신호등 기둥의 단말기에 갖다 대면 초록불이 3초에서 최대 13초까지 연장된다. 2009년 5개 교차로에서 시범 운영을 시작한 뒤 현재는 1000곳 이상으로 확대됐다. 모든 신호 시간을 일괄적으로 늘리지 않고, 필요한 사람에게만 시간을 더 주는 방식이다.

보행자가 카드를 갖다 대지 않아도 신호등이 알아서 ‘스마트’하게 작동하는 방법도 있다. 영종·청라국제도시 등에 추진되는 스마트 횡단보도는 인공지능(AI) 카메라가 사람을 인식해, 아직 차도에 보행자가 남아 있을 경우 보행 신호를 자동적으로 5~10초 연장하는 기능을 갖췄다.

스마트횡단보도. 보행자가 나타나면 횡단보도 주변에 가로등이 자동으로 들어온다. 동아일보DB
도로 자체를 스마트하게 바꾸려는 연구도 병행되고 있다. 예를 들어 ‘보행자·차량 신호 중첩(Overlap) 운영’ 방식은 교차로 구조와 교통량을 분석해 보행자 신호와 차량 신호를 일정 구간 겹쳐 운용하는 방안이다. 예를 들어 보행자가 진입할 때는 차량이 잠시 멈추고, 횡단이 끝나갈 즈음엔 다른 방향 차량이 움직이도록 신호를 배분한다. 교통 혼잡이 큰 도심에서는 실시간 교통량을 분석해 보행 시간을 자동으로 조정하는 ‘스마트 교차로’ 연구도 함께 진행되고 있다.

서울시청 앞 적색 잔여시간 신호등. 동아일보DB


● 47년 뒤면 길을 건너는 보행인 절반이 노인

초록불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려주는 ‘보행자 잔여시간 표시등’, 빨간불 잔여시간을 알려주는 ‘적색 잔여시간 신호등’도 신호 시간을 바꾸지 않고 위험을 줄이는 장치다. 원래는 무단횡단을 줄이기 위한 장치였지만,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에겐 다음 신호를 미리 준비할 수 있는 ‘예고등’ 역할을 하고 있다. 일전에 관련 기사를 쓴 적이 있는데 당시 취재한 어르신들도 “빨간불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있으니, 때맞춰 일어나 건널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72년이면 한국의 중위연령은 63.4세가 된다. 길을 건너는 사람 절반이 노인이 될 거란 이야기다. 지금은 길을 건너시던 그 어르신이 ‘남의 부모님’일지 몰라도, 머지않아 그 자리에 서 계실 분은 우리의 부모님이고, 언젠가는 우리 자신일지도 모른다.

누군가 번번이 어르신들 곁에서 길을 건너드릴 수는 없는 일이다. 나도 네 명의 부모님을 모시는 자녀이자 네 명의 아이를 키우는 부모다. 많은 시간을 부모님께 할애하긴 힘들다. 누군가 도와주지 않아도 횡단보도 위 노인들이 안전할 수 있는 대책이 시급하다. 언젠가 우리 모두 길 위의 느린 보행자가 된다는 걸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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