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경환 씨(36)는 강원도 고성이 고향이다. 어부의 아들로 태어나 화진포와 초도 일대를 뛰어놀며 자랐다. 지금은 고향에 아내와 두 살짜리 딸을 둔 가정을 꾸렸고 고성이 고향인 친구들과 고성으로 이주한 친구들과 뜻을 모아 행정안전부가 지원하는 청년마을 사업까지 벌이게 됐다. 하지만 고향을 떠났다 돌아오기까지 긴 여정을 거쳤다. 마치 거친 바다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온 연어처럼.
엄 씨는 속초시의 고등학교에 입학하며 고향을 떠난 뒤 춘천의 한 대학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했다. 고등학교 시절 공부보다 그림에 관심이 있었고 신문반에서 삽화를 그려 히트를 치기도 했다. 하지만 미대 진학에는 돈이 많이 들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대학에서도 전공보다는 디자인에 마음이 끌렸고 독학으로 배운 펜드로잉 기술을 배운 결과 졸업 후 서울의 한 제조업체 디자인 파트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다 친구의 소개로 서울 명문대 동양미술학과에서 진짜 미술을 전공한 아내 김소정 씨를 만났다. 고향 사람들의 눈에는 꽤 잘 풀린 케이스였다.
엄경환 대표와 김소정 씨 가족. 두살 난 딸과 반려견 아토도 함께 했다. 사진제공 엄경환 대표.
하지만 드넓은 바다에서 뛰어놀며 자란 그에게 답답한 도시 생활은 고행 그 자체였다. 급한 성격 탓도 있지만 “아파트 우리 집에 올라가는데 왜 엘리베이터를 이렇게 오래 기다려야 하지”라거나 “지하철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구겨져 어디로 가는 걸까”라는 기본적인 의문이 스스로를 괴롭혔다. 매일 새벽 2시까지 이어지는 회사 업무는 그를 지치게 했다. 무엇보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 그는 원초적인 외로움을 느꼈다.
인생의 방향을 틀어준 은인은 바로 아내 김 씨였다. 서울 토박이로 결혼 전부터 함께 그림책을 만들며 작품활동을 하던 김 씨는 어느 날 “우리 당신 고향으로 갈까?”라고 제안했다. 염려하는 친정 부모님께 “그림을 그리는 작가 부부에게 중요한 것은 어디에 사느냐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사느냐라고 생각한다”고 설득했다. 그렇게 엄 대표는 아내와 함께 2021년 고향으로 다시 돌아왔다.
고향에서 그는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을 했다. 당장의 생계를 위해 고성문화재단이 운영하는 영화관을 맡아 관리했다. 미래를 위해 양조기술을 배워 농업회사법인 주식회사 ‘엎질러진물 양조장’을 차렸다. 새벽부터 고기를 잡고 대낮에 돌아온 어부들이 즐겨 먹던 낮술에 착안해 ‘어부의 낮술’이라는 토속주 브랜드도 직접 디자인해 만들었다. 인생의 즐거움을 찾기 위해 아내와 함께 그림을 그리고 전시회를 열었다.
어부를 주제로 한 사진전. 사진제공 엄경환 대표. 부부가 그린 그림의 주제는 고성이라는 어촌과 어부에서 어촌의 문화와 역사로 확장됐다. 코앞에 마주한 북한으로 피랍돼 돌아오지 못한 어부와 가족들의 이야기, 돌아온 납북어부의 인생 역정 등을 그림으로 담아냈다. 지난해 영국 런던에서 전시회를 열었고 내년에는 대만에서도 그림을 전시할 계획이다. 속초시 납북어부 진상규명위원회 엄경선 기자와 인터뷰하고 아카이브 구축 작업을 하기도 했다. 정치외교학이 싫어 디자인으로 도망쳤지만,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전공도 활용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활동을 하는 과정에 뜻을 같이하는 고향 친구와 및 이주한 또래 친구들, 청년 예술가들을 만나게 됐고, 그들과 교류하는 과정에 중앙정부가 지원하는 청년마을 사업을 알게 되어 지원하게 됐어요.”
커피 제조 회사 대표, 스테이 카페 대표, 애견 간식 제조업체 대표 등 네 명이 의기를 투합했다. 아내 김 씨도 경영과 회계 일을 맡았다. 올해 초 행안부가 선정한 12개 신규 청년마을에 포함된 ‘곁 마을’ 마을은 이렇게 탄생했다.
엄 대표 부부와 친구 네 명 모두 반려견을 키우고 있다. 그래서 반려견과 함께 다양한 어촌 생활을 즐길 수 있는 마을을 만들겠다는 목표를 함께 세웠다. 반려견과 함께 머물고 반려견과 함께 산책하고 수영하고 관련 비즈니스를 만들어가는 허브가 되겠다는 목표다. 반려동물 친화 도시를 만들겠다는 고성군과도 협력할 예정이다.
23일 인터뷰에서 직접 만든 토속주 ‘어부의 낮술’을 소개하는 엄경환 대표. 고성=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반려동물로 조금 각을 세웠지만 어촌이라는 자연 속에서 사람들이 함께 행복할 수 있는 다양한 활동을 마련할 계획입니다.”
막 시작한 사업이어서 부부의 작업실에 사무실을 낸 정도다. 그래서 23일 오후 인제군 북면 용대리에 있는 용대자연휴양림 갑판 위에서 인터뷰했다. 이날 새벽 아버지가 잡아온 문어 한 마리를 익힌 숙회와 그가 직접 만든 ‘어부의 낮술’ 한 병을 함께 나누면서. “서울에서는 답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필요한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다녀올 수도 있다”라고 말하는 그는 낙향 결정이 대단히 만족스러운 듯했다.
“사실 여기서도 사는 게 힘이 들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서울에서는 내가 어쩔 수 없는 구조와 환경 때문에 힘들었지만,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너무 많아 생각을 가다듬고 실행 방안을 만드는 것이 힘들다는 것이 큰 차이예요. 저는 그게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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