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령사회가 시작됐습니다. 정부는 저출생, 고령화를 ‘극복’할 대책을 쏟아내고 있지만 지금 필요한 건 ‘적응’과 ‘변화’ 아닐까요. ‘적자생존’은 달라진 인구구조에 적응해야 살아남는다는 뜻입니다. 우리 사회가 초고령화에 적응하기 위해 고민해야 할 문제를 이야기합니다.
“퇴직하고 나니 내 경력은 더 이상 경력이 아니더라고요.”
29년간 교육회사에서 일하고 2년여 전 퇴직한 50대 장명익 씨는 최근 유튜브 채널 ‘퇴직학교’에 나와 이렇게 말했다. 그는 “회사를 오래 다녔으니 그 경력을 살리면 연봉은 좀 줄어도 금방 재취업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막상 나와보니 취업이 굉장히 어려웠다”고 했다. 교육 분야 경력을 살리고 싶어 딴 관련 자격증도 그가 맞닥뜨린 재취업시장에선 아무 소용 없었다.
현재 장 씨는 자기 경력과 무관한 중소 제조기업에서 제품 검수를 하고 있다. 그는 “몸은 좀 피곤하지만 (단순직이라) 일 스트레스가 없다는 점은 좋다”고 말했다. 이어 “퇴직 후에는 모든 것이 리셋(초기화)된다. 연봉도 최저시급까지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최근 정년 연장 논의가 활발하지만, 직장인들의 실제 퇴직 평균 연령은 정년 60세에도 못 미친다. 직장인 대부분은 정년 또는 그전에 오래 다닌 회사를 나와 재취업시장에 뛰어든다. 이들이 마주하는 현실은 장 씨가 말한 것처럼 퇴직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초고령사회에선 늘어나는 고령 인력을 잘 활용해야 하는데 고령자 노동시장은 여전히 ‘깜깜이’ 사각지대다. 정년 연장과 더불어 고령자 취업시장을 체계화하는 일이 시급하다.
● ‘깜깜이’ 고령 취업=하향 평준화
고령자 취업시장의 가장 큰 문제는 구직자나 구인 기업 모두 서로의 정보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구직자는 평생 쌓아온 경력을 입증하기 어렵고, 회사도 신입 채용만큼 시간과 노력을 들여 인재를 걸러낼 의지와 역량이 부족한 사례가 많다. 역량 있는 고령자도 재취업할 때는 경비원이나 사무보조 같은 단순 일자리 외에는 구하기 어려운 이유다.
해당 분야 전문가인 김경록 미래에셋자산운용 고문은 이 같은 고령자 재취업시장을 ‘레몬마켓’에 비유했다. 제품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소비자들이 무조건 싼값만 내려다 보니 시장에 낮은 품질의 상품만 남는다는 뜻이다. 중고차 시장이 대표적인 예다. 김 고문은 “모두가 평균적으로 비슷한 취급을 받기 때문에 좋은 중고차가 시장에 나오지 않는 것과 같은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결국 노후 준비가 잘된, 역량 있는 고령자는 노동시장을 떠나고 생계가 어려워 어쩔 수 없이 계속 일해야 하는 고령자만 시장에 남는 ‘역선택’이 발생한다.
이런 현실을 반영하듯 한국의 65세 이상 고용률(2024년 38.2%)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고 수준이지만 고용의 질은 매우 낮은 편이다. 지난해 9월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내놓은 ‘고령자 노동시장 실태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2023년 8월 기준 30~54세 취업자 중 비정규직 비율은 29.1%였다. 이 비율이 준고령자(55~64세)의 경우 49.9%로 높아지고, 고령자(65~79세)는 84.0%까지 치솟았다.
보고서에서 중위 임금의 3분의 2 미만을 받는 저임금 취업자의 비율도 30~54세는 8.9%지만 준고령자와 고령자는 각각 20.9%, 57.7%에 이르렀다. 또 준고령자는 30~54세보다 월 임금을 12.4%가량 적게 받았다. 고령자는 30~54세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임금(45.1%)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 ‘대졸’ 고령자 고용률, ‘고졸’보다 낮아
인구구조 변화로 노동시장에서 고령층의 비중은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통계청의 장래인구추계(중위 추계)에 따르면 2050년 65세 이상 인구의 비중이 전체의 40%를 넘을 것으로 전망된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이 생산성이 높은 ‘고역량’ 고령자는 노동시장에서 빠져나가고 ‘저역량’ 고령자만 남는다면 한국 경제는 더 빠른 속도로 쪼그라들 수밖에 없다.
눈높이에 맞는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운 탓에 고학력 고령자의 고용률은 상대적으로 더 낮게 나타난다. 2023년 65~79세 취업자 중 대학 졸업 이상 학력 보유자의 고용률은 41.0%로 고교 졸업(44.7%)이나 중학교 졸업 이하(42.9%)보다 낮았다. 30~54세와 55~64세 취업자는 학력이 높을수록 고용률이 높게 나타난 것과 대조적이다.
자료: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고령자 노동시장 실태 분석’이철희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2072년에는 대학을 졸업한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 인구의 3분의 1 정도를 차지할 것”이라며 “이들은 과거의 고령자와 달리 상당히 건강하고 생산적일 텐데 정년 연장만으로는 이들을 충분히 활용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지금처럼 상당수가 정년보다 일찍 재취업에 나서는 상황에서 이들이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면 일을 그만둘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이 교수는 “이미 높은 고령자 고용률을 더 올리기보다 생산적인 고령자가 노동시장에 더 참여하도록 유인할 방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고령 취업자의 생산성이 개선되면 인구 감소에 따른 경제적 타격도 줄어들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 생산성 높은 고령자가 계속 일해야
재취업시장에서 능력만큼 월급을 받을 수 있다면 생산성 높은 고령자들이 계속 일하는 쪽을 더 많이 선택할 것으로 기대된다. 재취업시장이 활성화되면 회사도 고령 직원에게 큰 폭의 임금 삭감을 일방적으로 제시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일할 사람이 줄어드는 가운데 숙련된 고령 인력을 붙잡으려면 재취업보다 더 큰 유인을 제공해야 하기 때문이다.
김 고문은 “고령자 취업시장의 정보 부족을 해소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며 “60세 이상 노동시장에 대한 세세한 데이터 구축과 연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현재 노동시장 관련 통계와 연구는 60세 이하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60세 이상 경제활동인구에 대한 통계와 연구가 축적돼야 이를 토대로 정부는 필요한 정책을 펼 수 있고, 구직자와 구인 기업도 ‘일자리 매칭’에 성공할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게티이미지뱅크이 교수는 “저숙련 위주인 평생교육훈련을 체계화해서 실효성을 높여야 한다”며 “대학 교육과정과 연계하는 등의 방식으로 고급 인력이 계속 일하게 돕는 재교육을 제공해야 한다”고 했다. 또 “나이가 아닌 능력에 따라 채용할 수 있도록 고령자 채용을 가로막는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미 지난해 취업자 5명 중 1명(22.7%)은 60대 이상이었다. 이들 고령 취업자는 매년 수십만 명씩 늘고 있다. 조만간 한국 노동시장의 주력 계층이 될 이들을 생산성 높은 일꾼으로 활용할 준비가 필요하다. 지금 시작해도 이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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