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명을 살리는 로드 히어로] 동아일보-채널A 2025 교통안전 캠페인
〈15〉 ‘자전거 천국’ 네덜란드
주거지 전체서 차량 속도 낮추고… 자전거도로 끊김 없이 깔아
‘아동 살해를 멈춰라’ 시민운동 불씨… 50년 새 사망자 3264명→675명
지난달 시민들이 네이메헌시의 자전거 전용 고속도로 ‘레인발파트’를 이용하고 있다. 이 도로를 이용하면 교통신호에 멈춰서지 않고 총 15.8㎞를 달려 인근 도시인 아른험까지 이동할 수 있다. 네이메헌=박종민 기자 blick@donga.com
“이곳에서 자동차는 손님일 뿐입니다. 시속 30km 이상으로 달릴 수 없죠.”
지난달 22일 오후 네덜란드 로테르담. 비영리기관 델프트도로안전과정(DRSC)의 테이어 호리스 총괄이 주택가 입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가 가리킨 곳엔 시속 30km 제한 표지판이 있었고, 뒤로는 검은 아스팔트 대신 붉은 벽돌이 깔린 자전거 도로가 이어졌다. 호리스 총괄은 “자동차 통행이 허용되지만 우선권은 어디까지나 자전거 이용자에게 있다”고 말했다.
● 혈관처럼 이어진 자전거도로
인구 약 1800만 명에 자전거 2400만 대로, 1명당 1.3대를 보유한 네덜란드에선 어딜 가든 붉은 자전거도로가 먼저 눈에 띄었다. 교차로에서도 끊이지 않고 이어지며 한적한 시골길까지 뻗은 자전거도로는 마치 혈액을 온몸 구석구석으로 나르는 ‘핏줄’처럼 촘촘했다. 기자가 호리스 총괄과 로테르담 일대를 돌아본 이날도 자동차보다 자전거를 찾기가 더 쉬웠다. 차는 자전거가 지나갈 때까지 멈춰 서는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네덜란드는 1970년대부터 주택가 등 생활도로에서 자동차 속도를 낮추고 자전거 이용을 확대하는 정책을 일관되게 펴 왔다. 그 결과, 네덜란드 교통안전연구소(SWOV)에 따르면 1972년 3264명이었던 사망자 수는 지난해 675명으로 줄었다. 50여 년 만에 5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든 것이다.
이는 안전뿐 아니라 교통 효율을 높이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네덜란드 자전거친선협회 조사를 보면 네덜란드의 자전거 교통 분담률은 약 27%다. 이동 거리 7.5km 이하인 시내 통행으로 좁혀 보면 33%로 올라가고, 암스테르담이나 위트레흐트 등 일부 도시는 50%를 넘어선다.
● 주거지 전체가 ‘시속 30km’
네덜란드는 도로 유형을 크게 생활도로와 집산도로, 통과도로(고속도로)로 나눈다. 주택이 밀집한 생활도로는 거의 예외 없이 시속 30km의 제한속도를 적용한다. 한국의 어린이보호구역과 유사하지만 지역 전체가 시속 30km로 묶인다는 점이 다르다. 일방통행로가 많은 것도 차량 흐름을 자연스럽게 제한하기 위한 설계다. 호리스 총괄은 “차가 멀리 우회하게 해 보행자와 자전거 이용자를 보호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근에는 도심 전체를 시속 30km로 낮추는 절차도 진행 중이다.
주거지를 벗어나면 생활도로와 고속도로를 잇는 집산도로가 나온다. 제한속도는 주로 시속 50km이며, 트램과 버스 등 다양한 교통수단이 뒤섞인다. 자전거도로는 연석이나 조경수, 주차 공간, 가드레일 등 구조물로 차로가 구분된다. 호리스 총괄은 “큰 사고를 낼 정도로 차가 빠르게 달리는 곳에서는 자동차와 자전거가 마주칠 가능성 자체를 없애도록 설계했다”고 말했다.
기자가 직접 자전거로 로테르담 일대를 돌아보니 한 번 올라탄 자전거도로가 목적지까지 끊김이 없이 이어졌다. 모든 교차로에 자전거 전용 신호등이 별도로 설치돼 있었다. 고속도로 옆에도 자전거도로가 나란히 조성돼 있었고, 허리 높이의 가드레일로 차량과 분리해 한국보다 보호 수준이 높았다.
네덜란드에서 자전거는 기차나 버스, 트램과 더불어 어엿한 교통수단으로 대접받는다. 전국 기차역에 마련된 대규모 자전거 주차장과 네덜란드 철도공사가 운영하는 공공자전거 시스템 덕이다. ‘자전거→기차→자전거’ 이동이 매끄럽게 이뤄진다. 네덜란드 자전거친선협회의 크리스 브륀틀럿 국제협력 매니저는 “자전거와 기차가 결합하면 50∼100km 이동도 자동차와 경쟁할 수 있다”며 “네덜란드에서 자전거는 ‘바퀴 달린 걷기’에 가깝다”고 말했다.
● ‘아동 살해를 멈춰라’가 만든 교통 혁신
처음부터 ‘자전거 천국’이었던 건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도시를 재건할 땐 자동차가 중심이었다. 자동차가 보급되면서 교통사고 사망자도 증가했다. SWOV에 따르면 1972년 교통사고 사망자 3264명 중 450명은 어린이였다.
이 무렵 한 현지 언론인이 등교 중 딸을 잃고 신문에 ‘아동 살해를 멈추라’는 칼럼을 썼다. 이 글을 계기로 전국적인 제도 개선 요구 시위가 촉발됐다. 브륀틀럿 매니저는 “이때부터 네덜란드의 교통체계는 자동차가 ‘마지막 선택지’가 되도록 방향을 틀었다”고 설명했다.
이 흐름을 떠받치는 철학이 바로 ‘지속 가능한 안전’이다. SWOV의 레티 아르츠 연구원은 “사고의 책임을 사람에게 돌리는 게 아니라 ‘실수가 반복되도록 방치한 시스템’에 묻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차로와 자전거도로를 물리적으로 분리하고, 여러 교통수단이 뒤섞이는 곳에서는 차량의 제한속도를 낮춰 자전거와 보행자의 안전을 보장하는 게 이에 해당한다.
아르츠 연구원은 “자전거 이용량과 함께 관련 사고가 늘면서 2010년대 이후 교통사고 사망자 감소세가 정체한 점은 네덜란드가 안은 숙제”라고 했다. 그는 “이미 시스템을 만들었다고 안심할 수 없다”며 “네덜란드는 지금도 무엇을 더 혁신할 수 있을지 끊임없이 점검하고 있다”고 말했다.
“강 아래 터널-공중 로터리까지”… 곳곳에 자전거 전용 인프라
자전거 고속도로 달려보니 15㎞도 45분 만에 주파 “자동차 못잖은 이동수단”
네덜란드는 다른 나라에서 보기 어려운 특별한 자전거 인프라를 다수 갖추고 있다. 중부 도시 위트레흐트 중앙역에는 자전거 1만2500대를 수용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지하 자전거 주차장이 있다. 한국의 대형마트 주차장을 연상시키는 이 시설은 여러 층과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각 구역마다 현재 주차된 자전거 수와 남은 공간을 한눈에 알 수 있게 현황판도 설치돼 있다. 자전거를 세우고 출구로 나가면 곧바로 기차역과 연결돼 환승이 매끄럽게 이어졌다. 암스테르담과 로테르담 등 주요 도시의 기차역에도 이와 유사한 구조의 주차장이 있다.
로테르담에는 니우어마스강을 사이에 둔 도시 남북을 잇는 자전거 전용 수중 터널까지 있다. 자전거에서 내려 목조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면 터널 입구가 나온다. 이 터널은 강 건너까지 직선으로 이어져 있다. 이 시설을 이용해 보니 마치 서울 강남에서 자전거를 타고 터널을 통과해 강북으로 건너가는 것 같은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네이메헌에는 자전거 전용 고속도로도 있다. ‘레인발파트’라는 이름의 이 도로를 이용하면 교통신호에 멈춰서지 않고 총 15.8km를 달려 인근 도시인 아른험까지 이동할 수 있다. 자전거를 타고 이 도로를 달려보니 네이메헌 중앙역에서 아른험 중앙역까지 이동하는 데 4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자동차로도 30분 이상 걸리는 거리임을 감안하면, 자전거가 경쟁력 있는 이동수단이 된 배경을 실감할 수 있다.
에인트호번시는 대형 교차로 혼잡을 완화하기 위해 지상 70m 높이에 ‘호번링’이라는 자전거 전용 로터리까지 만들었다. 실제로 에인트호번 교외에서 통근하는 수많은 자전거 이용자들이 이 시설을 이용하고 있었다. 현장에서 만난 브람 더 용 씨(42)는 “호번링이 없었으면 출퇴근 때 자동차로 막힌 도로에서 시간을 허비하거나, 자전거를 타더라도 먼 길을 돌아가야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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