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불법 계엄, 피고인과 같이 억울한 옥살이로 청춘을 어렵게 지내는 그런 일들이 다시는 없도록 저희 법관들도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겠습니다.”
21일 오전 서울 서초구 법원종합청사 403호 법정. 서울고법 형사4-2부 재판장 권혁중 부장판사가 43년 전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징역 5년을 선고받았던 김동현 씨(68)의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하며 이렇게 사과했다. 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의 고문 때문에 귀가 잘 들리지 않는 김 씨는 검은색 헤드셋을 착용하고 권 부장판사의 말을 들었다.
“피고인 잘 들립니까?”
“예!”
권 부장판사는 “지금부터 드리는 말씀은 판결문에 기재되지 않는 이야기들”이라면서 판결을 이어갔다. 그는 “피고인이 미농지에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럽게 적어나간 항소이유서를 보고 그 안에 담긴 피고인의 절규, 호소, 좌절과 희망을 모두 느낄 수 있었다. 어머니의 탄원서마저도 여러 가지 생각이 들게 했다”고 말했다. 이어 “안기부에 끌려가 오랫동안 구속되고 고문당하면서도 이러한 허위자백은 인권 수호의 최후 보루인 법원에 가서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희망을 가졌을 것”이라며 “피고인의 호소를 단 한 번도 귀 기울여주지 못한 점, 고문과 불법 구금에 대해 과감히 인정할 수 없던 그 용기 없음, 80년대 불법적인 계엄 상황에서의 소신 없음. 선배 법관들의 잘못에 대해 대신 사과드리겠다”고 덧붙였다. 비로소 헤드셋을 벗은 김 씨는 파란 손수건으로 연신 눈물을 닦아냈다.
성균관대를 다니던 김 씨는 1980년 광주5·18민주화운동을 접한 뒤 관련 시집을 내는 등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 안기부가 이른바 ‘대학교 불온 조직’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를 시작하자 김 씨는 국제사면위원회 스웨덴 지부에 5·18의 실상을 알리고 안기부를 고발했다. 스웨덴으로 망명하려던 김 씨가 국내로 돌아오자 안기부는 구속영장 없이 김 씨를 약 40일 동안 구금하며 구타와 물고문 등을 가했다. 김 씨가 주스웨덴 북한 대사관을 1번 방문했다는 이유로 반공범으로 몰아 수사한 것이다.
서울형사지법은 1982년 12월 김 씨에게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김 씨가 항소하자 서울고법은 징역 5년으로 감형했고, 대법원은 1983년 7월 김 씨의 상고를 기각하며 형을 확정했다. 당시 김 씨의 나이는 25세였다. 1심 판결에는 헌법재판소 탄핵심판에서 윤석열 전 대통령을 대리했던 조대현 전 헌재 재판관이 배석 판사로 참여하기도 했다.
김 씨는 지난해 1월 재심을 청구했고 재판부는 지난해 12월 재심을 결정한 뒤 이날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은 40일간 안기부에 불법구금 돼 구타와 가혹행위를 당하고 극단 선택을 시도할 정도로 심리적 위축 상태였다”라며 “피고인으로서는 다시 안기부로 불려 가 고문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허위 자백했을 가능성이 상당하다”고 판시했다. 이어 “피고인이 북한 대사관에 한 차례 들어간 행위만으로 그것이 국가의 존립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고 보기 어렵고 이를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다”고 밝혔다.
김 씨는 이날 동아일보 기자와 만나 “1987년 박종철 군처럼 물고문을 당했다. 밤인지 낮인지도 모르고 두드려 맞아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라며 “지금 생각하면 왜 그때 판사들이 똑바로 판결을 안 했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판사들도 안기부에 끌려가서 맞던 때”라고 눈물을 흘렸다. 이어 “돌아가신 어머니의 탄원서 이야기를 듣고 나도 눈물이 났다. 탄원서는 ‘아들이 이렇게 된 건 전부 내 잘못이다. 엄마가 잘못 키웠다’는 내용이었다”라며 “재판부의 정당하고 정의로운 판단에 대해서 정말 감사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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