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역 인근 불법 주차하곤
“당구장에 있는 지인 만나러 왔다”
“요금 2,3배 줄게” 택시처럼 호출도
李대통령 “허위 구급차 계도 필요”… 경찰-지자체, 이달부터 본격 단속
지난달 17일 오후 9시 반경 서울 관악구의 한 도로에서 불법 운행하던 사설 구급차 운전자가 경찰의 주의를 받고 진술서를 작성하고 있다. 환자를 태우지 않은 채 인도에 구급차를 불법 주차한 이 운전자는 “당구장에 지인을 만나러 가던 길이었다”고 진술했다. 최효정 기자 hyoehyoe22@donga.com
“당구장에 있는 지인을 만나러 왔다가 그만….”
서울 관악구 신림역 인근의 한 도로에 사설 구급차를 불법 정차한 운전자는 지난달 17일 오후 9시 반경 경찰관에게 이렇게 실토했다. 그는 ‘응급’이라고 적힌 사설 구급차에 환자도 태우지 않은 채 인도 위에 세워둔 참이었다. 관악경찰서 소속 권민형 경사(32)는 “이런 용도로 구급차를 쓰면 안 된다”고 경고하고 이 운전자로부터 진술서를 받았다.
환자 이송 같은 긴급 상황이 아닌데도 인도 등에 불법 주정차하거나 사이렌을 울리며 도로를 질주하는 이른바 ‘비긴급 구급차’가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자, 전국 지방자치단체가 사설 구급차의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기록을 확인해 불법 운행 여부를 단속하기로 했다.
● “요금 2, 3배 주겠다” 택시처럼 호출
구급차는 119 구급차와 사설 구급차로 나뉜다. 둘 다 응급환자 이송 등 정해진 목적을 어겨 사적으로 이용하면 응급의료법 위반으로 1년 이하 징역이나 1000만 원 이하 벌금에 처하거나 구급차 운행 면허가 취소될 수 있다. 또 긴급 출동이 아닌데도 경광등을 켜거나 사이렌을 작동하면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20만 원 이하 벌금 등에 처하게 된다.
하지만 119안전센터와 시도 소방상황실이 움직임을 통제하는 119 구급차와 달리, 사설 구급차는 비긴급 상황에서 운행해도 단속이 어렵다. 사설 구급차의 불법 운행이 빈번한 배경이다. 경남에서 10년 넘게 사설 구급차를 운행한 50대 운전자는 “일주일에 한 번은 정확한 증상도 말하지 않고 ‘(요금을) 2, 3배도 쳐줄 테니 그냥 가자’는 식의 연락이 온다”고 말했다.
실제로 2021년 한 사설 구급차 업체 대표는 식당 등을 방문하려고 구급차를 수차례 사용하다 적발돼 1심에서 벌금 90만 원을 선고받았다. 또 다른 운전자는 2021년부터 2022년까지 “교통체증 없이 빠르게 이동할 수 있다”며 행사 대행사, 연예기획사 관계자들로부터 30만 원을 받고 유명 가수를 공연장 등에 이송한 혐의로 2023년 벌금 200만 원을 선고받았다.
● 구급차 허위 운행, GPS로 잡기로
이재명 대통령이 6월 “허위 구급차 등 기초질서 위반에 대한 계도가 필요하다”고 강조하자 전국 지자체는 7월 교육을 거쳐 이달부터 본격적인 단속에 나섰다. 특히 운행기록대장만 확인하던 기존 방식과 달리, 이번 단속에선 최초로 전국에 있는 사설 구급차 업체의 GPS 기반 운행기록장치 데이터를 운행기록대장과 대조해 병원 왕복 외 다른 경로로 차를 몬 경우 등을 잡아낼 예정이다.
그동안은 지자체에 사설 구급차의 기록장치 데이터를 읽을 권한이 없었다. 그러나 사설 구급차 남용 문제가 심각해짐에 따라 보건복지부 등에서는 해당 권한을 지자체에 부여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서울시 관계자는 “아직 법적 권한은 없지만 특별 점검인 만큼 자치구가 업체에 데이터 제출을 요청했고, 이미 다수가 협조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향후 비긴급 구급차 단속을 강화할 방침이다.
의료 현장에선 미국, 영국의 사례 등을 참고해 허위 구급차 단속을 위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미국은 구급차 이송 비용을 허위로 청구할 경우 민형사상의 책임을 물을 수 있다. 2019년에는 미국 메릴랜드주 기반의 민간 구급차 업체가 앉거나 걸을 수 있는 환자들의 상태를 실제보다 심각한 것처럼 보고해 구급차를 운영했다는 사실이 직원들의 내부 고발로 밝혀졌고, 이 업체는 정부에 약 18억 원을 배상했다. 영국의 경우 공공기관인 보건의료품질위원회(CQC)에 구급차를 등록하도록 하고, 주기적인 현장 실사 및 불시 점검으로 등급을 부여하는 등의 방식으로 사설 구급차를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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