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철도공사(코레일)에서 열차 사고로 7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가운데, 정부가 특별 관리하는 27개 공기업에서만 지난 5년간 124명이 산업재해로 숨진 것으로 분석됐다. 27곳 중 13곳은 안전 인력이 기준보다 적었고, 21곳은 안전 예산을 다 쓰지도 않았다.
25일 동아일보가 ‘안전 관리 대상’ 공기업 27곳의 ‘2024년도 안전경영 책임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2020∼2024년 5년간 가장 많은 산재 사망자가 발생한 곳은 한국전력(33명)이었다. 한국도로공사(30명)와 한국토지주택공사(29명), 코레일(10명), 한국수자원공사(7명) 등이 뒤를 이었다.
이들 공기업은 안전 투자와 인력 충원에 소극적이었다. 전체 안전 예산은 지난해 21조9196억 원으로 2023년 대비 약 8% 증가했지만, 실제 쓴 돈은 19조8395억 원으로 집행률이 90.5%에 그쳤다. 안전 인력을 채우지 못한 공기업도 13곳이나 됐다. 이곳들의 안전 인력 정원은 2만5136명이었지만 실제 고용된 인력은 2만4419명에 머물렀다.
특히 코레일은 지난해 안전 인력을 전년보다 104명 줄였다. 인건비 절감 등으로 기획재정부 경영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받으면 임원진이 더 많은 성과급을 받는다.
안전관리등급(1∼5등급) 심사에서 1등급(우수)을 받은 공기업은 2020년 이후 단 한 곳도 없었다. 코레일과 한전, 도로공사 등은 3등급(보통)에 머물렀다.
“서류엔 ‘방염복-안전화 구매’ 현장 가보면 허름한 작업복”
공기업 산재 분석 하청업체 안전예산 서류상 집행 안전 관련 인력-장비 턱없이 부족… 성능 부족한 사재 무전기 사기도 안전담당자 “현장관리 강화 필요”
“방염복과 안전화를 구매했다고 증빙 서류를 제출하지만, 막상 현장에 나가 보면 허름한 차림으로 작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전에서 안전 업무를 담당하는 A 씨는 “하청 공사 업체들의 안전 예산이 서류상으로만 집행되는 경우가 많다”며 25일 이렇게 말했다. 한전에선 최근 5년간 산재 사망자 33명이 발생했다. 그런데도 지난해 안전 예산 2조7402억 원 중 집행액은 2조5744억 원에 그쳤다. A 씨는 “안 써도 될 곳에 돈이 들어가고, 써야 할 곳엔 들어가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주요 공기업의 현장 안전관리자와 작업자들은 이처럼 예산이 허위로 집행되는 경우가 많고, 여전히 안전 인력이나 관련 장비는 부족하다고 토로했다. 실제론 장비를 구매하지 않고 서류상으로만 처리해 예산을 타내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공식 안전 장비가 부족해 작업자가 주머니를 털어 사제 용품을 사는 사례도 있었다. 철도 안전 관리 현장에서 근무하는 B 씨는 “현장에서 코레일과 소통하려면 전용 주파수를 쓰는 무전기가 필요한데, 여분이 없어 빌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그래서 대다수 안전관리자는 직접 사제 무전기를 사서 들고 다닌다”고 했다. 그는 사제 무전기는 공식 장비보다 무전거리가 짧아 산악이나 터널 지형에선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안전 인력 한 명이 담당해야 하는 현장이 늘어나면서 관련 서류 작업 업무도 증가했다. 이러다 보니 정작 현장을 직접 확인할 시간은 줄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공기업 안전 담당자는 “중대재해처벌법 등의 시행으로 서류 작업이 늘어나 현장에 집중하기보단 오히려 안전 서류 작성에만 집중하게 되기도 한다”며 “직원 한 명당 관리하는 업체가 여러 곳이고, 직원의 지시를 듣지 않는 ‘무단작업’도 여전히 적발되는 만큼, 직원당 공사업체와 건수를 줄여 한 번이라도 더 현장에 나갈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법제의 허점도 드러났다. 산업안전보건법상 50억 원 미만 소규모 공사 현장엔 안전관리자를 배치하지 않아도 되는데, 최근 5년간 30명이 산재로 사망한 한국도로공사의 경우 약 88%의 현장이 이 범주에 해당됐다. 공사 측은 보고서에서 스스로 “수익성 위주로 인력·예산을 투입하는 등 한계가 존재한다”고 밝혔다. 실제로 지난해 도로공사가 집행한 안전 예산은 1조7004억 원으로, 편성된 예산(1조8327억 원) 중 1000억 원 이상을 남겼다. 공사 관계자는 “소규모 공사 현장에도 안전관리자를 배치하는 등 단계적으로 기준을 현실화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공기업이 안전 관련 예산을 늘리고 있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격으로 실효성 있게 쓰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정진우 서울과학기술대 안전공학과 교수는 “단순히 예산 총액을 늘릴 게 아니라 산재를 실질적으로 예방할 수 있도록 정부가 각종 예방 기법을 개발, 안내, 홍보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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