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단체 예약… 내가 알려준 업체서 술 사놔라” 선결제 시킨뒤 ‘노쇼’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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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기관-병원-대기업 직원 사칭
고가 양주 등 특정업체 알려주며… 자영업자들 돈 뜯어내고 안나타나
올해 7월까지 2892건, 414억 피해… 현행법으론 피해금 회수 어려워

서울 종로구에서 20년 넘게 백숙집을 운영해 온 박순임 씨(67)는 올 6월 ‘22명이 방문한다’는 단체 예약 전화를 받았다. 예약자는 “OO증권 대리”라며 명함과 사원증 사진까지 보내왔다. 불황으로 어려웠던 와중에 오래간만의 대형 예약이었다. 그런데 곧 “회장님이 오시니 ‘맥켈란 25년 셰리오크’ 3병을 준비해 달라”며 백숙집에서는 팔지 않는 비싼 위스키를 요구했다. 이어 자기가 소개한 업체에 900만 원을 송금하면 저렴하게 구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수상함을 느낀 박 씨가 “평소 거래처를 통해 술을 준비하겠다”고 하자 예약자는 연락을 끊었다.

● 외식 불황 노린 ‘노쇼 사기’ 피해 폭증

이처럼 단체 예약 후 특정 업체를 소개하며 대리 구매를 요청하는 전형적인 2단계 구조를 보이는 ‘노쇼(No-show)’ 사기가 증가세다. 박 씨는 최근 석 달 동안 이런 전화를 무려 3번이나 받았다고 한다. 노쇼 사기는 외식 불황 속 단체 예약을 놓치고 싶지 않은 소상공인의 기대 심리를 노린다. 여기에 1박 2일이라는 비교적 짧은 범행 기간에 1000만 원가량의 범죄 수익을 거두는 ‘박리다매형’이라는 점도 새롭다.

21일 경찰청에 따르면 올해 1∼7월 노쇼 사기는 총 2892건 발생했고 피해액은 약 414억 원에 달했다. 특히 7월 한 달에만 피해액이 총 163억 원에 달했다. 올 1∼5월 월평균 피해액(29억 원)의 5배가 넘는 폭증세다. 발생 건수도 1∼5월 월평균 234건에서 7월 935건으로 크게 증가했다.

사기범들은 먼저 피해자가 운영하는 점포에 물품을 대량 주문하거나 단체 예약을 문의한다. 안심시키기 위해 유명인이나 공공기관, 병원 및 대기업 관계자를 사칭한다. 다음 단계에서는 피해자가 취급하지 않는 고가 물품의 대리 구매를 요청한다.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특정 업체를 소개하고 돈을 먼저 내게 한다. 경찰이 파악하는 피해액은 대리구매를 위한 실제 송금액만으로 산정된다. 재료 준비 등으로 인한 손해까지 포함하면 실제 피해는 더 클 수밖에 없다. 한국철도공사(코레일) 직원을 사칭해 약국에 ‘응급의료세트’를 구매하겠다고 한 이후 함께 구비할 방독면의 대금을 대신 송금해 달라고 한다거나, 군부대를 사칭해 떡집에 떡을 주문한 후 전투식량의 결제금도 결제해 달라는 유형의 사칭도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 현행법상 피해 복구 사각지대

범행 기간과 건당 피해 금액이 상대적으로 짧고 적은 것도 노쇼 사기의 또 다른 특징이다. 올 들어 발생한 노쇼 사기 건당 평균 피해액은 약 1431만 원인 반면, 같은 기간 보이스피싱 건당 평균 피해액은 5280만 원이다. 즉, 노쇼 사기는 오랜 기간 공을 들여 고액을 노리는 방식이 아니라 짧은 시간 소상공인 등을 대상으로 하는 일종의 박리다매 형태의 피싱이다.

사기범들은 조달청 나라장터에 공개된 정보를 활용해 공공기관을 사칭하기 때문에 당하는 입장에선 속아 넘어가기 쉽다. 실제로 공공기관에 물품을 납품해 본 점포에 해당 공공기관을 사칭해 전화하는 방식이다. 경찰청은 나라장터에서 계약 주체와 내용을 누구나 조회할 수 있는 점을 악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정보 일부를 비공개·비실명 처리하고 본인인증 절차를 거치도록 개선해 달라고 요청했다.

현행법으로는 노쇼 사기를 당해도 피해금 회수 등이 어렵다는 점도 문제다. 현행 통신사기피해환급법은 ‘재화의 공급 또는 용역의 제공 등을 가장한 행위’의 경우 법 적용 대상에서 제외한다고 규정하기 때문이다. 노쇼 사기의 2단계에서 물품을 받기 위해 입금한 것이 법의 적용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이다. 국회엔 이 같은 단서 조항을 삭제하는 내용을 담은 개정안이 올해 3월 발의됐지만 소관 상임위원회에 계류된 채 논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노쇼 사기#단체 예약#대리 구매#소상공인 피해#나라장터 악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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