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내 민원 왜 종결했냐” 토씨만 바꿔 또 접수… ‘출구’ 없는 악성민원

  • 동아일보
  • 입력 2026년 5월 22일 04시 30분


[1% 민원에 휘둘리는 사회]〈4·끝〉 56년 묵은 ‘무조건 접수’ 규정
3회 이상 반복땐 종결 가능하지만 5년간 6433만건 중 종결 1.3%뿐
韓 ‘무조건-신속 친절 접수’ 원칙… 日-英 등은 악성민원 전화 차단
“접수 단계서 종결 절차 마련해야”

서울의 한 자치구 민원실에는 공무원 누구나 이름을 아는 40대 여성 주민이 있다. 그는 2023년 1월부터 이달까지 “인근 병원 직원이 불친절하니 징계하라”는 민원을 82건 접수했다. 의료기관 종사자의 응대 태도는 법적 규제 대상이 아님에도 구는 32건가량 답변과 설득을 이어갔다. 이후 동일 민원이 3회 이상 반복되면 종결할 수 있다는 법 조항에 따라 해당 민원을 종결 처리하자, 이 주민은 “왜 종결했느냐”며 토씨만 바꾼 채 같은 민원을 다시 밀어 넣고 있다.

● ‘반복 민원’으로 종결, 1.3%뿐

이처럼 악성적인 반복 민원을 끊어낼 법적 출구가 현장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21일 국민권익위원회가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이정문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2021년부터 올 4월까지 전국 행정기관에 접수된 국민신문고 민원은 총 6433만 건이다. 그런데 이 중 반복 민원으로 분류돼 종결 처리된 사례는 1.3%인 84만 건에 불과했다.

이는 1970년 민원사무처리규정 제정 당시 명기한 ‘무조건 접수’와 ‘신속·친절’ 원칙이 현재의 민원처리법까지 이어져 온 탓이다. 지방자치단체와 교육청 등 행정기관은 부당한 민원이라도 일단 접수해 통상 14일 이내에 답변을 마쳐야 한다. 국민 권익을 위한 배려가 도리어 악성적인 반복 민원에 악용돼 정작 긴급한 도움이 필요한 취약계층 등 다수의 권리가 뒤로 밀리게 된 것이다.

악성 민원을 차단할 유일한 장치는 ‘3회 이상 접수 시 종결’ 조항뿐이다. 하지만 이는 내용을 살짝 바꾸거나 민원인의 명의를 바꾸는 꼼수에 쉽게 무력화된다. 부산 해운대구에는 지난해 12월 “아파트 단지에서 고양이에게 먹이 주는 사람을 처벌하라”는 취지의 민원이 반복 접수됐지만, 여러 사람이 번갈아 접수했기 때문에 종결 처리할 수 없었다. 올해 2월 서울의 한 자치구에서도 특정 단체 소속으로 의심되는 여러 명이 “(구청이 관리 중인) 동물을 직접 보호하겠다”며 민원을 170건 접수했지만 민원인이 모두 달랐기 때문에 일일이 답변해야 했다.

● “규정대로 끊어내면 ‘보복 민원’ 폭탄”

학교도 마찬가지다. 전북 군산시의 한 초등학교는 올해 운동회에서 ‘음식 금지’, ‘천막 밖 이동 제한’ 등 경고문을 내걸었다. 지난해 운동회 당시 “흙 묻은 손으로 음식을 먹게 놔뒀다”, “우리 애는 햇빛 알레르기가 있다” 등 10여 명의 학부모가 번갈아 민원을 제기한 데 따른 조치였다.

적법하게 종결 처리해도 이를 빌미로 후속 민원이나 소송을 쏟아내면 현장 공무원으로선 대처하기 어렵다는 점도 문제다. 강원 춘천시에선 한 90대 주민이 2024년부터 “타인 소유 건물을 철거해 달라”는 민원을 반복해서 제기했다. 관련 부서가 동일 민원으로 판단하고 종결 처리했지만, 그는 이를 문제 삼아 최근까지 20여 차례 민원실을 찾아와 욕설하며 소란을 피웠다. 담당 직원은 “종결 처리해서 꼬리 민원을 감수할지, 그냥 참고 답변을 반복할지 중에서 후자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했다.

그나마 종결 대상도 국민신문고 등을 통한 전자·서면 민원에 국한됐기 때문에 전화나 방문 민원은 사각지대다.

● 日·英은 악성 민원 전화 차단까지

반면 해외 주요국은 민원 횟수와 무관하게 그 요구 자체가 불합리하다고 판단하면 민원권 자체를 제한하는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다. 일본은 직원의 업무 환경을 위협하는 행위를 ‘카스하라(カスハラ·고객 괴롭힘)’로 정의하고 경찰 신고 등으로 적극 대응한다. 특히 불합리한 민원을 반복해서 제기하면 대응 창구를 단일화거나 “더 이상 응대할 수 없다”고 답변할 수 있다. 실제 오사카부는 한 해 e메일 1만여 건과 전화 700여 건을 쏟아낸 한 여성 민원인의 전화를 금지하는 소송을 벌여 승소했다.

영국도 민원인의 통화 빈도가 과하면 번호를 차단하거나 접촉 시간과 횟수를 제한한다. 나아가 해당 민원인의 관청 출입 자체를 거부할 수 있다. 호주는 민원인이 종결 처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후부턴 무응답으로 일관한다. 호주 연방 옴부즈만은 2021년 발행한 지침에서 한 반복 민원인에게 “새로운 근거를 내지 않으면 응대하지 않겠다”고 통보한 사례를 명기했다.

우리 정부도 대응에 나섰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달 12일 X(옛 트위터)에 “고질 만성화된 반복 민원은 민원인의 삶을 황폐화하고 행정 낭비를 초래한다”고 적었다. 행안부는 ‘3회 이상 반복’에 해당하지 않아도, ‘업무 방해 등 의도가 있는 경우’ 등까지 종결 대상 민원으로 분류하는 민원처리법 개정을 추진 중이다.

전문가들은 소수의 악성 민원까지 수용해야 하는 ‘무조건 접수’ 원칙을 유지할지 다시 생각해 볼 때가 됐다고 지적했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학과 교수는 “방문·전화 반복 민원도 종결 처리하거나 접촉 단계에서 제한할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김현수 명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해외처럼 반복 민원을 접수 단계에서 분리·종결하는 절차를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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