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달 31일 경북 경주시 라한셀렉트호텔에서 열린 2025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갈라만찬에서 대화를 하고 있다. APEC 2025 KOREA 제공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때 문득 떠오르는 노래가 있었다. 극우 유튜브만 보던 그분이 만일 구치소에서 뉴스를 봤다면 불렀음직한 곡이다.
“니가 사는 그 집, 그 집이 내 집이었어야 해/니가 타는 그 차, 그 차가 내 차였어야 해/니가 차린 음식, 니가 낳은 그 아이까지도…”
불경스러운가. 한중 국빈만찬에 참석했던 대중문화교류위원회 공동위원장 박진영의 작품(니가 사는 그 집)이니 너그럽게 봐주시기 바란다. 이 노래와 함께 이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만일 국민의힘 대통령이 주재했다면 이만한 성과를 낼 수 있었을까. 2년 전 잼버리 때 무능과 무책임으로 국제 망신을 자초했던 그들이.
● APEC 참가 21개국 중 완전민주는 5개국 뿐
이재명 대통령이 1일 경주화백컨벤션센터(HICO)에서 열린 2025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에 참석한 각국 정상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우리에겐 식민지 경험 후 산업화와 민주화를 완수한 나라는 우리밖에 없다는 자부심이 있다. APEC에 참가한 나라를 봐도 식민지 경험이 없는 나라는 식민지 종주국인 일본을 빼면 미국, 중국, 태국 정도다(러시아는 몽골의 지배를 받았고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도 영국 식민지였다).
국힘이 업둥이로 모셔온 대통령 윤석열은 그런 자부심을 사정없이 무너뜨렸다. 영국 이코노미스트가 매년 발표하는 민주주의지수에 따르면 2024년 우리의 민주주의는 ‘결함 있는 민주’다. 2023년 22등(‘완전 민주’)에서 10등이나 추락해 32등이다(우리가 또 등수에 예민하지 않나).
민주주의 쇠퇴가 세계적 현상이긴 하다. 참가국 중 ‘완전민주’가 뉴질랜드(2등) 호주(10등) 대만(12등) 캐나다(14등) 일본(16등) 5개국에 불과하다는 건 놀랍고도 씁쓸하다(트럼프의 미국도 ‘결함 민주’로 28등이다). 하지만 오랜 계엄 등 우리와 비슷한 정치문화를 겪은 대만이 우리 경제를 추월한 건 물론 민주주의에서도 앞선 점은 주목할 일이다.
● 이왕이면 유능한 독재가 낫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 부설 경제 분석기관인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이 발표한 ‘민주주의 지수 2024’(Democracy Index 2024) 지도. 푸른색에 가까울수록 민주주의, 붉은 색에 가까울수록 독재 국가로 분류된다. 조사 대상 167개국 중 한국은 32위였다. 전년(22위)보다 열 계단 하락했다. 위키피디아1인당 GDP 9만 달러인 싱가포르는 당연히 ‘결함 민주’다(68등). 같은 ‘결함 민주’인 태국은 등수로 별 차이 안 나는데(63등) 1인당 GDP가 7000달러다. 두 나라 중 어디에서 살고 싶느냐고 묻는다면, 나 같으면 싱가포르다. ‘유능한 독재자’와 ‘무능한(민주적이면 그래도 다행이지만 아니면 큰 일이다) 통치자’ 중에 어느 쪽이 나은지 굳이 따져보는 이유다.
독재국가로는 러시아(150등) 중국(145등) 베트남(133등)이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그래서 이번 아시아 순방길에 중국 시진핑까지 만난 미국 트럼프 대통령을 놓고 뉴욕타임스는 ‘민주주의 이상은 아젠다에서 사라졌다(‘As Trump Tours Asia, Democracy’s Ieals Aren’t on the Agenda’)’며 트럼프가 만난 독재자들을 소개했다.
이 속에 혹시나 이재명 대통령도 들어있나 싶어 조마조마했다. 아니었다! 오히려 NYT는 한국을 윤석열의 불법 계엄에 맞선 불타는 시민정신의 나라로 봤다. NYT는 말레이시아 총리 안와르 이브라힘를 소개하며 태국과 캄보디아 국경 분쟁 종식을 중재해 평화협정 서명식에 참가한 트럼프한테 엄청난 찬양을 늘어놨다고 했다. “평화 증진을 위해 세계는 당신처럼 끈기와 용기를 가진 리더를 필요로 한다”며 “그러기 위해선 규칙도 깨야 한다”는 식으로 말이다(NYT가 트럼프의 민주주의 파괴 행각을 줄줄이 지적한 건 물론이다).
● 이 대통령, 보수의 안보-친중 불안 날렸다
지난달 22일 경남 거제시 한화오션 거제사업장에서 장보고‑Ⅲ Batch(배치)‑Ⅱ 1번함인 ‘장영실함’ 진수식이 열렸다. 거제=박형기 기자 onehsot@donga.comAPEC의 진정한 성공은 이 대통령이 보수의 불안을 일단 날려버렸다는 데 있다. 한미 정상회담에서 트럼프로부터 원자력 추진 잠수함 (연료 공급) 승인을 받아낸 것이다. 특히 “디젤 잠수함은 잠항 능력이 떨어져 북한이나 중국 측 잠수함 추적 에 제한이 있다”고 북-중을 콕 집어 말한 것은 신의 한수였다. 보수의 의제인 안보를 확보하고, 좌파정권의 친북-친중에 대한 불안을 날려버린 것이다.
이 대통령은 한중회담에서도 한 건 했다. 국가주석 시진핑에게 샤오미 스마트폰을 선물받고는 “통신 보안은 되나”하고 조크를 던진 거다. 시진핑도 “뒷문(백도어)이 있는지 확인해 보라”고 조크로 받았다. 이 역시 친중 편향에 대한 불안을 한 방에 날린 쾌거였다(시진핑에게 뒤끝이 남지 않았다면).
국군의 날(사실은 밤) 별들에게 폭탄주 말아 돌린 대통령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한중회담 때는 더 독한 술이 오르지 않았을까 싶다. 만일 마이크를 잡고 “니가 사는 그 집, 그 집이 내 집이었어야 해/니가 차린 음식, 니가 낳은 그 아이까지도…” 불렀다면, 그 입을 틀어 막아버렸을 것같다.
● 사법부 장악하면 민주주의지수 뚝 떨어질 것
3일 오전 국회 본청 민주당 당대표실에서 정청래 당대표와 전현희 TF단장 등이 참석한 사법행정 정상화 TF 출범식이 열렸다. 동아일보 DB이 대통령이 외교에서 성과를 낼 때마다 집안에서 미친 듯 널을 뛰는 더불어민주당 지도부는 기이하기도 하다. 참다못해 4일 대통령실이 민주당이 추진하는 ‘재판중지법’에 제동을 걸었다.
민주당이 ‘사법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법원행정처 폐지, 대법관 26명 증원, 법관 평가제 등을 밀어붙이는 건, 할 줄 아는 게 그것뿐이기 때문이다. 다수 국민에게 가장 절실한 민생경제나 아이들 교육문제, 노후 생활, 주거, 전월세, 연금과 노동 개혁 같은 문제는 어렵고 복잡해서 민주당 의원님들은 들여다볼 엄두도 못 내는 듯하다. 그러면서 제일 쉬운, 그리고 대통령 앞에 ‘해냈다’고 뻐기기 딱 좋은 ‘사법부 리스크’ 해결만 붙들고 이 난리다.
선출권력의 독재 공식 1순위가 ‘사법부 장악’이라는 건 세상이 다 안다. 재판중지법은 다행히 멈췄다 해도 법원행정처 폐지(를 통한 법관 인사권 장악), 대법관 증원(을 통한 인사권 장악) 등을 밀어붙인다면, 한국의 민주주의지수는 뚝 떨어질 것이다.
● 우리는 민주주의 아니면 못 참는다
지난해 12월 13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 앞에 모인 시민들이 윤석열 당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 통과를 촉구하며 일명 ‘응원봉 집회’를 열고 있다. 동아일보 DB한때, 싱가포르처럼 유능한 독재자면 괜찮지 않은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대만을 보시라. 민주주의도, 경제도 다 잘하고 있다(심지어 진보정부다). 우리에겐 민주국가 수립 12년 만에 불의를 못 참고 4‧19혁명을 일으킨 역사가 있다. “너 죽고 나 죽자”가 우리의 평등 DNA다. 반민주 대통령을 둘이나 탄핵으로 날려버렸다. 민주주의 아니면 못 참는 체질인 것이다.
민주체제에선 무능한 통치자도 다음 선거까지 기다리면 정권교체가 가능하다(윤석열처럼 자폭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독재체제에선 정권교체가 불가능하다. 선출된 정권이 사법부와 선거관리위원회 등 ‘심판’을 장악하면 선거를 해도 야당 승리가 어려워진다. 이게 요즘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그리고 민주당에서 추진하는 새로운 독재다. 독재자가 당장은 유능해 (보여)도 언제까지 총기가 남아날지 알 수 없다. 언론통제로 유능한 점만 보도될 수도 있다. 3권분립을 통한 견제와 균형, 언론자유가 중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 대통령이 재판중지법을 중지시켰듯 민주당의 나머지 사법부 장악 시도까지 중지시켰으면 한다. 이 대통령을 보는 보수의 눈이 달라지고 있다. 이제는 민생경제, AI 강국 만들기에 힘썼으면 좋겠다. 이로 인해 극렬 좌파한테 이 대통령이 ‘수박’으로 공격받는다면, 보수가 이 대통령 지키기에 나설 수도 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