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발달로 간접 경험 늘어…겪는 대신 먹방-언박싱 등 ‘시청’
눈앞 풍경보다 폰 촬영각에 신경
동영상 재생 시작 2초 넘어가면 시청 포기, 짧은 지루함도 못 견뎌
◇경험의 멸종/크리스틴 로젠 지음·이영래 옮김/364쪽·1만9800원·어크로스
팬데믹을 거치며 줌을 활용한 화상 미팅이 보편화됐다. 그러나 저자는 “신체적 신호, 표정, 어조를 읽을 수 있는 대면 대화가 ‘더 깊고 매끄러운 사회적 교류’를 가능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동아일보DB
컴퓨터나 휴대전화로 화상회의를 하고,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으로 길을 찾으며, 원격 웨이팅 앱을 이용해 식당 줄서기를 대신한다. 요즘 평범한 현대인의 모습이다. 이처럼 기술은 인류의 삶을 ‘혁명적으로’ 편리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편리함의 이면에는 “직접 경험”의 쇠퇴라는 문제도 똬리를 틀고 있다.
이 책은 디지털 기술의 발달이 인류의 감각과 사고, 관계 등에 어떤 변화를 불러왔는지 탐구한다. 미국 문화비평가이자 역사학자인 저자는 “우리가 ‘겪는’ 대신 ‘보는’ 데 익숙해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스마트폰 등이 매개가 된 유튜브 세상에선 게임, 먹방, 언박싱 등 온갖 종류의 간접 경험들이 넘쳐난다. 짧은 순간에 남의 경험을 엿보는 데 익숙해진 것이다. 미국 10대의 64%가 “투표권보다 소셜미디어를 선택하겠다”고 답했고, 세계 청소년 53%가 “후각을 포기하더라도 기술은 포기할 수 없다”고 할 정도다.
책은 일곱 장에 걸쳐 기술을 통해 얻은 간접 경험이 실제 경험보다 더 우선시되는 시대의 여러 양상을 다룬다. 특히 ‘손글씨’에 대한 고찰이 인상적이다. 모두가 타이핑하는 시대에 살면서 우리는 잉크와 종이가 주는 감각적 경험, 손글씨가 주는 시각적 즐거움을 잃어버렸다. 이제 영어 필기체를 제대로 쓸 줄 아는 미국 청소년은 드물어졌다. 중국도 ‘제필망자(提筆忘字·펜을 들었는데 글자가 생각나지 않는다)’란 말이 보편화됐다. 그러나 저자는 “손글씨는 인쇄된 글자가 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옛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고 말한다.
기다림이 어느새 ‘제거해야 할 대상’이 된 시대도 조명한다. 놀이공원에 방문하는 이들은 스마트폰을 보며 지루함을 견딘다. 아이들도 호출기를 손에 쥐고 테마 공간에서 논다. 하지만 이런 ‘기다림의 부재’가 과연 좋은 것일까.
“지루함에서 달아나기 위해 휴대전화를 확인하는 것은 시간의 폭정에 맞서는 작은 혁명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혁명은 때때로 자신을 삼켜버린다.”
빅테크 기업의 엔지니어들은 사람들이 400ms(밀리초·1000분의 1초)의 지연도 길게 느낀다는 사실을 포착해 앱과 홈페이지를 만든다고 한다. 동영상 2300만 개를 시청한 시청자 670만 명을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2초 안에 동영상이 재생되지 않으면 상당수가 시청을 포기했단다. 자극을 마약처럼 갈구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짧은 지루함조차 견딜 수 없게 된 인간은 자신의 생각과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게 된다”고 지적한다. 딴생각을 하면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창의성도 발현하기 어려워진다. 이 밖에도 책은 복잡한 감정을 소셜미디어의 ‘좋아요’로 대체하는 ‘감정의 아웃소싱’, 눈앞의 관광지 풍경보다 스마트폰 렌즈 각도에 신경 쓰는 ‘기술로 매개된 쾌락’ 등 누구나 공감할 법한 문제점들을 다룬다.
결국 “‘경험의 멸종’은 자연스러운 진화가 아니라, 우리가 만든 선택의 결과”라는 게 책의 메시지다. 저자는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기 전에 스스로에게 엄격하게 질문을 던지라”고 말한다. “우리 공동체에 이 기술이 어떤 영향을 미칠까?”, “우리 가정에 좋은 영향을 줄까?” 같은 의문을 품을 때 기술은 목적이 아닌 인간 생활을 편리하게 하는 보조적 도구의 본분을 다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책을 읽다 보면 스마트폰 대신 소중한 사람과의 눈맞춤을, 건조한 인스타그램 속 ‘좋아요’ 대신 마음을 담아 눌러쓴 손편지가 그리워진다. 불완전함과 모순 속에서 놀랄 정도로 창의적인 발상을 해내곤 했던 ‘인간다움’을 우리는 갈수록 잃고 있는 건 아닌지 고민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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