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끝 철강-석유화학… 제조업체 84% “주력제품 경쟁력 잃어”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8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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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조업 10곳중 8곳 “레드오션 진입”
“수출 원동력 산업, 시장 포화-감소”
韓철강, 中공급과잉에 영향력 축소… 여야, 철강산업 지원 ‘K스틸법’ 발의
“中, 정부지원 업고 가격-기술력 앞서, 韓은 혁신 부족… AI 등 지체” 지적

국내 제조기업의 약 80%는 주력 제품 시장이 ‘레드 오션’에 진입했고 자사 제품의 경쟁력도 높지 않다고 판단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경기 평택시 평택항에 철강 제품이 쌓여 있는 모습. 평택=뉴스1
“중국 배터리가 예전엔 가격에서만 앞섰다면, 요즘은 기술력에서도 한국 제품에 우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중국의 거대한 내수 시장과 정부 지원을 따라가기 벅찬 상황입니다.”(국내 이차전지 기업 임원 A 씨)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을 견인했던 철강이나 석유화학 등의 산업은 이미 성숙기, 혹은 쇠퇴기에 들어섰다. 반도체와 자동차 이후 한동안 대(代)가 끊겼던 한국 제조업의 새로운 ‘주력 산업’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이차전지는 중국에 밀리고 있다. 인공지능(AI) 등 후속 산업 발굴은 지체되는 중이다. 우리 기업들이 평가한 한국 산업의 냉정한 현주소다.

● 현재는 레드오션… 그래도 미래 투자 못 해

대한상공회의소가 국내 제조업체들에 설문조사를 한 결과 주력 제품 시장이 ‘성숙기’(시장 포화)나 ‘쇠퇴기’(시장 감소) 등 경쟁이 치열한 ‘레드오션’에 진입했다고 응답한 기업이 전체의 82.3%에 달했다.

비금속광물(시멘트업종 등)이 가장 높은 95.2%였고, 정유·석유화학(89.6%), 철강(84.1%), 기계(82.9%), 섬유(82.4%), 자동차·부품(81.2%) 순이었다. 1960년대 이후 한국 경제의 수출 원동력이었던 주요 산업들이 모두 레드오션에 진입했다는 기업들의 자체 진단이 나온 것이다. 응답한 제조기업의 83.9%는 자신의 업종에서 “(경쟁국에 비해) 우위가 없거나 추월당했다”고 평가했다.

경쟁력이 추월당한 대표 업종이 철강이다. 그동안 글로벌 시장을 이끌던 한국 철강 기업들의 영향력은 최근 크게 축소됐다. 중국발 공급 과잉이 주된 원인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지난해 철강 글로벌 공급 과잉이 6억3000만 t에 달했는데, 이는 국내 철강 생산량(6300만 t)의 10배에 이르는 수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4일 국회에서는 여야 의원 106명으로 구성된 국회철강포럼이 한국 철강 산업 지원을 위한 특별법, 이른바 ‘K스틸법’을 공동 발의했다. 보조금 지원과 세금 감면, 융자 지원 등이 핵심 내용이다.

한국이 비교우위를 가지고 있던 특수강 분야도 중국산 덤핑 제품에 밀린다. 중국 업체가 저가의 특수강 봉강을 국내에 반입하면서, 국내 철강업체들의 영업이익은 2년 만에 90% 넘게 줄었다. 세아베스틸과 세아창원특수강은 이날 무역위원회에 중국산 특수강 봉강에 대한 반덤핑 조사를 신청했다.

석유화학 역시 중동과 중국발 공급 과잉 문제가 부각하면서 공급량 감축 등 구조조정 전망이 나온다. 컨설팅 업체인 보스턴컨설팅그룹은 향후 2, 3년 동안 1500만 t 수준의 에틸렌 및 범용 폴리머 신규 공장이 가동되며 2030년까지 공급 과잉이 이어질 것으로 봤다.

● “혁신 부족이 제조업 위기 불렀다”

전문가들은 최근 국내 제조업 부진에 대해 신사업 진출을 주저하는 ‘혁신 부족’을 이유 중 하나로 꼽는다. 한국 기업이 철강이나 석유화학 분야에서 값싼 노동력 등을 바탕으로 미국이나 유럽 기업을 밀어냈듯, 중국 인도에 추격당하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기존 산업 경쟁력을 잃기 전 정보기술(IT) 분야를 키웠다. 한국도 기존 산업이 건재할 때 과감한 대체 산업 투자를 해야 했지만,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남대일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국내 기업들이 신산업에 투자하지 않고 기존 산업 지키기만 하다 ‘제조업 위기’에 직면했다”고 진단했다.

대한상의 설문 결과 국내 제조업체 중 57.6%는 “현재 진행 중인 신사업이 없다”고 답했다. 신사업 추진을 못 하는 이유로는 ‘자금난 등 경영 악화’(25.8%)와 ‘신사업 시장성 사업성 확신 부족’(25.4%)을 꼽았다. 김정호 KAIST 전기전자공학부 교수는 “한국 제조업 경쟁력 확보를 위해서는 AI나 로봇을 이용한 생산성 향상이 필요한 상황”이라며 “인프라 구축에 많은 투자가 필요한 만큼 정부 지원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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